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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교우들 “임금이 공개적으로 입국 허락하지 않는 한 영접 어렵다” 2024-07-08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선교를 지원했던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 사제 모방·샤스탕 신부는 1834년 조선 입국을 위해 북경에 도착했다. 당시 북경교구장 서리 페레이라 주교는 두 사제를 북경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모방 신부를 서부 달단으로, 샤스탕 신부를 산동으로 보냈다. 모방 베드로(사진 위)·샤스탕 야고보 신부 성인화.


1834년 4월 1일 북경에 도착한 모방 신부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페레이라 주교의 협조 없이는 북경을 통해 조선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과 조선의 접경에 연락 거점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장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변문 근처에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협조할 중국인 교우 가족을 정착시켜 조선 교우들과의 지속적이고 안전한 연락망을 확보하고,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국경을 넘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행히 산서대목구장 요아킴 살베티 주교가 이 일에 적합한 교우 2명을 추천했습니다. 저는 이 둘을 면담했는데 둘 중 능력도 뛰어나고 의지력도 강했던 자는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반면, 의사인 다른 사람은 여행 경비만 대주면 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느님 사업에 동참한다는 열망 한 가지만으로 2~3년간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일도 감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게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조선 교우들이 저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확실해야 하며, 둘째, 유럽 선교사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마카오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이러한 저의 계획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저를 돕겠다고 나선 중국인 교우를 협잡꾼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착각한 것이지요. 그는 잘 알려진 사람이고 산서 주교가 뽑은 사람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반대로 중국과 조선 국경지대에 연락 거점을 세우겠다는 저의 계획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1834년 4월 24일 모방 신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4월 1일 북경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제게 물었습니다. 그는 1833년 12월 중순 복건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 차례 난파해 나귀를 타고 북경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북경 관문을 지키는 이들이 그가 갖고 있던 엽전을 모두 빼앗고 통과시켜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서양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북경까지 오는 동안 얼굴이 많이 상했고, 먼지를 어찌나 뒤집어썼던지 유럽 선교사 한 명이 왔다는 통보를 받았음에도 페레이라 주교가 그를 중국인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페레이라 주교가 모방 신부를 유럽인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것은 그가 중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후부터였다고 합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경악했다고 합니다. 유럽인이 황제가 발행한 통행증 없이 황제 호위대의 호위도 받지 않고 북경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에 깜짝 놀란 것이지요. 페레이라 주교는 이 사실이 발각되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자신도 지병을 구실로 북경 체류 허락을 받고 주교관에 연금 상태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방 신부를 서부 달단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고맙게도 페레이라 주교는 모방 신부를 북경에서 내보내기 전에 제게 연락을 취하게 해 준 것입니다.
 

프랑스 라자로회 소속 설 마태오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한 조선 선교사들을 적극 도왔다. 설 마태오 신부 스케치화.


설 마태오 신부에게 서만자 은신처 요청

현재 중국 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유럽인들이 북경에서 쫓겨남으로써 교회는 손실보다 이익을 보았다고 봅니다. 지방에 있는 선교사들이 수배되거나 체포되는 일이 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관들은 증오와 질시의 대상인 선교사들을 자기들 눈앞에서 더는 보지 않기 때문에 교우들을 박해할 생각을 덜 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인 신부들은 자신들의 봉사를 조금도 고맙게 여기지 않는 왕족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그들의 소명과는 상관이 없는 예술과 학문을 진흥하는 데 귀중한 시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교회에 아무런 득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말로는 북경에는 수백만 명의 주민이 있고, 2세기 전부터 엄청난 수의 사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광활한 성 안에 사는 교우는 고작 3000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교우들도 아니고요.

모방 신부는 페레이라 주교가 마련해준 은신처에서 숨어지냈습니다. 그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만이 그를 자주 찾아갔습니다. 저는 모방 신부에게 조선 교우들이 올 때까지 북경에 남아 있으라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북경에 숨어 있기가 곤란하면 프랑스 라자로회 소속 중국인 설 마태오 신부가 있는 서만자(西灣子)로 가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모방 신부는 제 편지가 북경에 도착하기 전인 1834년 6월 8일 서부 달단으로 떠났습니다. 제 편지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저는 이 편지에서 그에게 다른 길과 다른 만남의 약속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계획이 실현 가능하며 또한 유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 조선에서 받은 소식들은 이런 방식이 시기상조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입증해 줬습니다.

저의 동반자 왕 요셉이 홀로 산서대목구에서 조선 국경까지 3500여㎞나 되는 길을 떠났습니다. 저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는 1834년 5월 12일 산서대목구청을 떠나 550㎞를 걸어 5월 27일 서만자에 도착해 설 마태오 신부를 만났습니다. 설 신부는 왕 요셉에게 얼마간의 여행 경비와 동행인 한 명을 붙여 줬는데 그는 왕 요셉보다 길을 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5월 28일 제게 편지를 썼고 같은 날 국경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왕 요셉은 아무런 성과 없이 1834년 9월 8일 산서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왕 요셉이 떠나기 전 설 마태오 신부에게 서만자에 저의 은신처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제가 마카오에서 출발하기 전 라자로회 대표부의 장 바티스트 토레트(1801~1840) 신부에게 추천받은 사제입니다. 그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추방당할 때 끝까지 남아 있다가 라자로회 선교부를 서만자로 옮긴 인물입니다. 설 신부는 저의 요청에 “기꺼이 맞이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의 유럽인 선교사가 박해를 받는 것이 오히려 지방 선교사들에게는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지방에 대한 박해의 손길이 덜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 라자로회 소속 설 마태오 신부가 책임자로 있는 서만자를 조선 입국로의 주요 거점으로 개척하려 했다. 1920~40년대 서만자 성당과 신학교 전경.


페레이라 주교, 샤스탕 신부 북경 체류 불허

1834년 8월 29일 저는 조선 교우들이 보낸 2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조선 임금이 저를 공개적으로 입국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한 영접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황님이 무장한 배 한 척에 선물을 싣고 사신 한 명으로 조선 임금에게 보내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첫 번째 사절단이 실패하면 완전한 성공을 거둘 때까지 새로운 예물을 가지고 또 다른 사절단을 계속해서 파견해야 한다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항덕 신부의 의견을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를 가져온 연락원은 제게 요동의 어떤 교우도 주교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일러줬습니다. 그는 여항덕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고, 조선 교우 9명에서 11명이 체포돼 고초를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교우 수가 최소 2만 명은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샤스탕 신부의 소식을 알려줬습니다.

샤스탕 신부는 1833년 9월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11월 복안에 도착한 후 모방 신부를 만났고 둘 다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강남에 도착한 그는 조선 국경지대까지 가서 집 한 채를 장만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타고 달단에 상륙했고, 한 달을 헤맨 끝에 조선 국경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조선 땅을 바라보며 여항덕 신부와 조선 교우들을 기다렸으나 끝내 만나지도 못하고 자신을 뒤따라올 선교사를 위한 집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는 다시 배를 타고 북경 인근에 하선해 북경까지 온 후 페레이라 주교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페레이라 주교는 그가 북경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샤스탕 신부는 사천 출신으로 페낭 신학교에 다녔던 교우와 복건 출신 교우를 만나 그들의 집에 5주간 숨어지내다 북경으로 잠입해 페레이라 주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샤스탕 신부에게 마카오로 돌아가든지, 산동으로 가서 북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신부 아래 사목을 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샤스탕 신부는 산동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설 마태오 신부는 샤스탕 신부가 곤경에 빠질까 봐 그를 서만자로 데려오기 위해 긴급히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샤스탕 신부는 페레이라 주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동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 2024-07-08 오전 9:58:09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