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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떼 기도의 힘을 믿고 2024-07-02


코로나 팬데믹을 뚫고 2022년 8월 밴쿠버 여행을 다녀왔다.

직장 후배인 세레나 씨의 초청을 받은 지 벌써 몇 년. 코로나가 잠잠해진 6월, 서둘러 여행 계획을 세웠다. 막내딸 헬레나와 함께 7월 30일 떠나 8월 18일 돌아오는 일정으로 일찌감치 비행기 표까지 끊었다.

그런데 7월 들어, 갈수록 확진자가 늘면서 다시 삼엄한 분위기가 되었다. 큰 마음 먹고 계획한 것이라 선뜻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온 세계가 시끄러워서 카톡을 넣었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니 여행 취소할까?” 했더니, “여행은 도전이에요. 자꾸 미루다가 언제?”라는 답이 왔다. 맞다. 여행은 도전이다. 막내도 모처럼의 여행에 신이 나서, 거기에 맞춰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뛰는데 취소는 안 될 일. 게다가 날씨까지 너무 더워 얼른 서울을 탈출하고만 싶었다. 백신 맞은 영문 증명서 등 준비할 서류가 많았지만, 차근차근 다 마치고 7월 30일 서울을 떠났다.

마중 나온 후배가 반갑게 맞으며 말한다. 한 사람이라도 지켜 우리가 밥을 얻어먹어야 하니, 남편은 집에 남아 기다리고 있다고. 차에 오르자 진단 키트부터 내민다. 하하. 유비무환. 우리 둘 다 음성이 나와서 천만다행!

집에서 우리를 반겨준 프란치스코 형제. 그는 정채봉 프란치스코 형제와 함께 남편 스테파노의 대자이다. 1990년대 초반, 우리 세 가족은 오며 가며 참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1995년 세레나 씨 가족이 밴쿠버로 이민을 떠났고, 남은 두 가족에게 꼭 한번 놀러 오라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우리 오면 따 먹으려고 뜰에 자두나무를 심었다며. 그런데 애석하게도 1997년 남편이 떠나고, 2001년 정채봉 씨가 떠나면서 두 가족이 놀러 가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다가 80을 넘긴 내가, 그것도 코로나 난리 속에 그곳을 가게 되었으니 감개무량. 커다랗게 자란 자두나무 등걸을 어루만지며 떠난 사람들을 그리워해 보았다. 세레나 씨는 자녀들이 쓰던 2층을 통째로 내주면서 방 하나씩 차지하고 편안히 있으란다. 일류 호텔 부럽지 않다.

산과 호수가 많은 고장 벤쿠버. 우리 모녀는 그들 안내를 받으며 2010년 동계올림픽을 치렀다는 휘슬러를 비롯, 여러 명소를 돌며 일주일 동안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8월 7일, 딸과 나만 현지 여행사를 따라 록키 여행을 떠났다.

가도 가도 끝없는 록키산. 쭉쭉 하늘로 뻗은 침엽수와 그 사이로 어쩌다 나타나는 곰, 군데군데 보이는 에메랄드빛 호수, 하얗게 눈 덮인 산, 녹아내리는 빙하 등을 구경하며 하루 7~8 시간은 보통이고 어떤 날은 10시간까지 차를 탔다. 벤프, 제스퍼, 레이크 루이스….

그렇게 즐기고 다니는데, 10일 새벽 콧물이 조르르 흘렀다. 설상차를 타고 얼음판을 돌며 좀 춥다고 느꼈는데, 그래서인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점점 안 좋아진다. 그런대로 여정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코로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이 가는 곳마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1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진단 키트를 사용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분홍색 줄이 뜬다. 그때의 난감함이라니! 딸이라도 먼저 보내야지 싶어, 비행기 표를 바꾸고 출발 전날 검사를 받게 하는 등 동분서주, 고맙게도 14일, 탈출에 성공시키고, 나는 후배네 2층을 독차지하며 격리 생활로 들어갔다. 프란치스코는 부지런히 약을 챙겨 주고, 세레나는 시간 맞춰 영양식으로 밥상을 차려다가 2층 계단에 올려 준다. 외로운 독거노인 신세 좀 면해 보려고 나왔는데, 차려다주는 세끼 밥만 축내는 ‘삼식이 신세’가 되어 버리다니!

18일 귀국이 가능할까? 대개 1주일 남짓 걸린다니 아슬아슬. 하루 전에 음성이 나와야만 비행기를 탈 수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한담! 기도의 힘을 믿는 나는, 그날로 나의 여행을 알고 있는 친지들에게 기도를 부탁한다는 카톡을 올리고 나도 종일 묵주만 돌리며 살았다. 저녁이면 진단 키트로 검사를 해 보는데, 처음 분홍색이던 줄은 점점 또렷해지더니 14일엔 완전히 까만 두 줄이 나왔다. 후유, 이를 어쩌나! 비행기 표 바꾸기도 쉽지 않고 어쩌든지 제날짜에 가야 하는데…. 16일 오후, 줄이 좀 희미해졌다. 절정에서 내리막길인 듯. 예약된 병원 검사 날은 17일 오후 3시. 나는 자신이 없었다. 후배에게 병원 예약을 취소하고 18일 오전 공항에서 검사하는 것으로 예약하자고 졸랐다. 마침 비행기가 오후 2시 반이니 오전에 음성이 나오면 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상하게도 하루만 더 지나면 음성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것은 순전히 믿음이었다. 나의 성채(城砦)인 조국에서 열댓 명 기도부대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나도 날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좀 봐 주시지 않을까?

그들 부부도 내 말에 수긍하고 예약을 취소하랴, 다시 잡으랴, 분주하다. 경비는 더 들었지만 지금 돈이 문제인가. 오, 하느님, 어서 내 나라에 가고 싶어요. 아파도 내 집에서 아프고 싶어요. 나는 어린애처럼 보채며 기도했다.

마침내 18일 아침, 소금물로 콧속을 몇 번이나 닦고, 공항 의무실로 갔다. 결과는 두 시간 후에 나온단다. 지루할까 봐 후배가 공항 주변 드라이브를 시켜 주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결과를 보러 공항 의무실로 들어갔다. 검사원이 말한다.

“네거티브(음성)!”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국의 공항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참으로 어린애처럼 보채며 생떼 기도를 드렸던 일주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조국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왔고.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소설집 「둘만의 이야기」 「치마폭에 꿈을」 수필집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회 회원이다.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월간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중앙대문학상, 제1회 자랑스러운 광양인상을 수상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07-02 오전 9:12:0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