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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잃고 방황하는 영혼의 처방은 ‘기다림’ 2024-06-19

우리는 여유없이 부족한 시간 속에 바쁘고 빠르게 살아가고 있다. 미국 뉴욕 거리에서 바삐 움직이는 시민들. 출처=Wikimedia Commons


어떤 일이든지 아주 빨리 그것도 훌륭하게 잘 수행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부터 주변을 둘러봐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봐도 낯설게 느껴지면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가끔은 자신의 이름까지 생소하다. 결국 병원을 찾게 되는데, 의사로부터 뜻밖의 진단을 받는다. ‘당신은 영혼을 잃었습니다.’

영혼은 본래 제 속도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남자가 성급하게 너무 빠르게 달려왔기에 영혼은 주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의 처방은 ‘기다림’이다. 영혼은 아마도 ‘이삼 년 전쯤’에 머물고 있을 테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어두운 흑백 공간의 의자에 앉아 영혼을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치고 더럽고 할퀴어진 한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다. 남자와 아이는 단번에 서로를 알아본다. 둘은 나란히 앉아 햇볕을 맞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마주한다. 집안은 따스한 온기가 올라오고 화사한 공간으로 변한다. 색색의 식물이 자라고 꽃이 핀다. ‘드디어’ 영혼을 찾았다.

노벨상을 수상한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의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이야기다. 허겁지겁 앞만 보고 달리며 살아온 남자는 기억과 수면장애 불안증에 시달린다. 그런데 늙은 모습의 남자에게 찾아온 영혼은 뜻밖에도 천진난만한 순수한 아이다. 영혼은 푸른 새싹을 돋게 하고 화려한 꽃을 피운다. 영혼을 잘 챙겼어야 했다. 영혼의 속도에 맞춰 함께 걸어왔더라면 남자의 모습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현대인은 늘 시간이 부족하고 바쁘다는 느낌으로 산다. 기술의 발전으로 날로 편리해지고 빠르게 일 처리를 해주는 기계와 함께 살면서도 ‘시간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여가를 보내고 스마트폰에 빠져 살지만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분명 옛 세대보다 덜 일하고 더 놀고 있는데 말이다.

전기가 없던 사회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전기가 들어오면서 낮이 확장되었다. 일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 결정적으로 시간은 곧바로 ‘돈’으로 환산된다. 시간이 중요한 이유다. 게다가 디지털 세상은 아예 밤이 사라졌다. 거리와 공간의 제약도 희미해지고 언제 어디서든지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도 일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바빠도 너무 바쁘다. 시간을 늘릴 수는 없으니 ‘속도’가 중요하다. 대부분 시간으로 돈이 계산되고 일의 결과로 돈의 금액도 달라진다.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소유의 양과 질이 결정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존재 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단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시간’을 존중한다. 하지만 소유 양식으로 사는 사람은 축적한 과거에 얽매이면서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식 속에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에 쫓기고 굴복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소유하면서 존재를 확인하는 삶의 양식은 더 많은 소유에 집착하면서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에 의하면 성공한 기업가들이 대부분 ‘성급’하다고 한다. 일을 절대로 미루지 않고 빨리 해내려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수도자인 나도, 누군가 “다음에 만나요”라고 하면, ‘갈 일 있으면 들르겠다’고 말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이 된 것이다. 전화가 오면 “어, 무슨 일로?”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도 ‘일’이다. ‘그냥 왔어’, ‘그냥 전화했어.’ ‘그냥’이란 말은 참으로 한량처럼 느껴진다. 존재 양식보다 소유 양식의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평생 청춘으로 살 것처럼 열심히 달린다. 그러다 뇌에 버퍼링이 생겼는지 익숙한 단어조차 입에서 맴돈다. 목과 허리에 통증이 생기고 무릎도 저리고 각종 성인병에 시달린다. 몸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삶의 질도 하락하니 허망하고 공허하다. 그렇게 마음과 몸의 속도가 늦춰지면서 묻게 된다. “내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마음의 집에 꽃을 피워주고 생명력을 찾아 줄 순수하고 해맑은 나의 영혼과의 만남,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성이 묻는 안부>

많은 시간 소유 양식으로 살아오지 않았나요? 부자가 되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고, 권력과 명예를 얻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열심히 빨리빨리 질주하며 살아왔지요. 나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소유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쫓다 보니 영혼을 잃은 줄도 몰랐고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소유’의 끈을 놓고 보니 이제야 제 속도대로 살게 됩니다.

멈춰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헐떡이며 찾아온 빛나고 향기 나는 아이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드디어’ 영혼을 단번에 알아보길 바랍니다. 마음의 집에서 푸른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핍니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이제는 영혼을 잃지 않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06-19 오전 11:12:1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