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가 지난 4월 6·25전쟁 전후 충청지역에서 발생한 적대세력에 의한 종교인 희생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는 대전·예산·공주·당진 등에서 천주교인 20명이 희생됐으며, 본당별로는 합덕본당 신자가 7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본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외 동료 80위’ 명단에 없는 당시 신자 희생자를 추가로 확인한 바 있다.<본지 제1762호 5월 26일자> 김용진·박영기·조규흥·김남중씨 등 4명이다. 본지는 1950년 7~9월 합덕성당을 중심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깊이 들여다봤다. 국가기관 공식 기록물인 과거사위의 최근 발표 자료집과 「구합덕본당 100년사」, 책자 「마을로 간 한국전쟁」를 교차 참조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합덕성당 전경. 성당 뒤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6·25전쟁 때 백문필 신부와 신자 등 다수가 희생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출처=당진군
당시 합덕본당은
인민군, 토지개혁 실시하며 종교인 숙청했지만
합덕 지역은 마을 특성상 우익 마을로 존속
와중에 백문필 신부와 신자들 끌려가 처형돼
새롭게 확인된 신자 4명의 죽음
지방 좌익 세력들, 마을 습격해 신자들 체포
죽창 등에 찔려 죽거나 처형돼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에서 확인
합덕본당·교우촌, 인민군 점령 후에도 우익마을로 남아
내포는 현재 서산·당진·홍성·태안·보령 등 충남 서해안 지방을 지칭한다. 이 지역은 해로로 청(중국)과 가까워 천주교가 유입되는 경로였고, 100여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박해가 풀린 후 조선 교회는 합덕에 본당을 설립했다. 이후 본당은 재정 자립과 교우촌 건설을 위해 이 일대 농지를 집중 매입했다.
땅을 산 주체는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였다. 1920년까지 약 23만 6000평의 논과 3만 6000평의 밭을 샀고, 대부분 땅은 합덕에 있었다. 합덕본당은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소작인은 성당에 다니도록 했다. 자연스럽게 합덕 지역은 교우촌이 됐다.
토지 매입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950년 이승만 정부가 농지 개혁할 당시 천주교는 내포 일대에만 약 58만 5000여 평의 땅을 소유했다. 합덕면 소작 농민들은 별도의 소작인 상조회를 꾸렸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다른 마을 소작인들이 만든 당진소작조합에 들어가지 않아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전쟁 18일째인 7월 12일 인민군이 당진을 점령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지휘하는 내무서가 군에 설치됐다. 하부 조직으로 각 면에는 분주소(파출소)가, 리에는 자위대의 치안조직이 설치됐다.
합덕면 분주소장은 오헌○, 부소장은 최기○, 인민위원장은 재건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됐던 공산주의자 주윤흥이 맡았다. 이들은 지주와 경찰·공무원, 그리고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인에 이르는 소위 반혁명세력의 숙청을 주도했다. 아울러 점령 당국은 이 일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특히 이를 가난한 농민과 머슴(고농)이 주도하도록 했고, 이승만의 토지개혁에서 분배 대상이 아니었던 머슴에게도 땅을 나눠주었다. 하지만 교우촌이었던 합덕면 지역은 교우회장을 인민위원장으로 내세우는 등 겉으로는 점령 당국에 협조했지만 마을 특성상 여전히 우익마을로 남아있었다.
합덕본당 주임 백문필 신부·윤복수·송상원의 체포·처형
8월 14일 백문필(필립 페렝,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와 윤복수·송상원 세 사람이 끌려갔다. 이날은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가 봉헌 중이었고, 신자 400여 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10시 30분 백 신부가 고해성사를 베풀고 있을 때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긴 칼과 권총을 찬 북한 인민군 장교와 내무서 간부가 들어 왔다. 그리곤 다짜고짜 ‘반동 두목 신부 나와’라고 소리쳤다. 백 신부는 그들을 쏘아보며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버릇없이 마구 들어와’, ‘이 무식한 놈들아 내일이 성모 승천 대축일인지도 모르나’라고 일갈했다. 약 30분 후에 수단을 입고 손에 경본만을 들고 나뭇가지들로 위장된 군용차에 타셨다. 차가 백미터쯤 갔을 때 논에 갔다 오던 송(상원) 복사님이 달려가 ‘나는 신부님을 모시는 복사다’라고 함께 가셨다.”(고 김동억 신부, 「구합덕본당 100년사」 중)
“신부님을 군용트럭에 태우니까 윤 회장이 근처에 있다가 쫓아간 것 같다. ‘너는 뭐냐''하니 ‘신자 대표’라 했고 함께 끌려 갔다.”(고 김영환 신부, 「구합덕본당 100년사」 중)
백 신부는 9월 22일 당진내무서에서 외국인 신부 6명과 함께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이어 9월 25~26일 사이 새벽 처형됐다. 천주교 성직자라는 게 이유였다. 송상원도 천주교인이자 복사라는 이유로 대전형무소에서 처형됐다. 「구합덕본당 100년사」 및 「하느님의 종 홍용호 외 동료 80위」 명단에는 그가 9월 말 당진에서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과거사위는 ’피살자 명부'' 등에 근거해 교회 자료와 달리 대전형무소에서 처형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윤복수는 당진내무서에 붙잡혀 있다가 인민군이 후퇴할 때 끌려 나와 9월 27~28일 사이 읍내리 공동묘지에서 처형됐다. “이틀 밤 사이에 죽은 사람이 약 170명이라고 한다. 윤(복수) 회장 시체를 찾았는데 머리만 맞은 채 숨져 있었다. 윤 회장은 우리가 감옥소에 있을 때 함께 있었고 백 신부는 대전으로 갔다고 들었다.(이 마르타 수녀, 「구합덕본당100년사」 중)
과거사위는 자료집에서 윤복수가 신도회장이었고, 백 신부를 체포할 때 방해했기 때문에 희생됐다고 밝히고 있다. 백 신부와 윤복수·송상원 3인은 ''하느님의 종 홍용호 외 동료 80위’에 포함돼 있다.
합덕본당 신자 김용진·박영기·조규흥·김남중의 처형
9월 28일 서울 수복 직후 ○○리의 ○○마을 주민 일부가 합덕리를 습격했다. 그들은 김용진·신영식·오기선·박영기·조규흥·신경호·김동환 등을 끌고 갔다. 김용진은 합덕국민학교 사친회장으로 지역 유지이자 합덕본당 신자였다. 그는 합덕본당에 조직된 합덕청년회 사무실을 지키다 지방 좌익 황○○ 등에게 체포됐다. 합덕분주소에 하루 정도 구금돼 있다가 9월 29일 새벽 합덕국민학교 뒤 옷박골(당진군 우강면 창리)로 끌려갔고, 죽창 같은 것에 찔려 사망했다. 김용진 외에 박영기와 조규흥도 사망했다.
박영기·조규흥 역시 합덕리 마을 유지이자 합덕본당 신자였다. 과거사위는 이들이 지역 유지이자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지방 좌익 등 적대세력에게 희생된 것으로 판단했다. 과거사위는 이들과 함께 끌려가 사망한 신영식·신경호·오기선·김동환은 제적등본 멸실 등 자료 미비를 이유로 진실규명 대상자로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합덕본당 100년사」를 보면, 신경호가 합덕청년회 체육부장으로 기록돼 있어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들도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진실규명 대상자로 선정된 김남중은 9월 25~26일 대전형무소에서 인민군 등 적대세력에 의해 처형됐다. 과거사위는 그가 합덕읍에서 7월 15일~8월 14일 지방 좌익에게 체포돼 대전으로 이송된 것으로 추정했다. 김남중은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합덕본당 신자였다.
김용진·박영기·조규흥·김남중 등 4명은 ''하느님의 종 홍용호 외 동료 80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최근 새로 확인된 신자 희생자다. 이들이 신자로 활동한 사실은 과거사위 자료집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
합덕의 비극과 치유
1950년 10월 국군이 이 지역을 수복했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이 철수하자 우익 청년들은 치안대를 조직해 마을마다 부역자를 색출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은골(송산리1구)에서 처형돼 한 구덩이에 묻혔다. 자료에 따르면, 전쟁 중 합덕면에서 처형된 사람은 합덕본당 신자들을 포함한 우익 250여 명, 좌익 400명 정도다. 전쟁은 합덕 일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71년.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지역 마을 간 또 다른 ‘작은 전쟁’으로 크나큰 아픔이 서린 곳이 내포 지역이다. 여전히 우리에겐 용서와 화해가 필요하다.
이상도 선임기자 raelly1@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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