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안셀름 그릔 신부님의 저서 <50가지 예수 모습>에서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제 나이와 예수님의 나이가 비슷하다는 데서 오는 친밀감과 안셀름 신부님께서 해석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다양하면서도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예수님을 구세주, 나그네, 여성의 벗, 화해 주선자, 자유인, 가정 문제 상담원, 이야기꾼, 고독자, 이방인 등 성서 말씀을 토대로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보, 술꾼, 광대 등으로 비유한 몇몇의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대체로 예수님이 지니신 모습을 잘 짚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세례를 받았는데 본명은 ‘베로니카’로 정했습니다. 성녀의 축일과 제 생일이 같고 ‘참된 모습’이라는 베로니카의 어원이 제 이름의 ‘진(眞)’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골고다 언덕에서 넘어지신 예수님께 손수건을 건네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땀을 닦아 주신 분을 제 수호성인으로 모시면서 제 신앙의 여정에서 만난 예수님의 첫 번째 모습은 진리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을 무렵, 저희 본당에는 갓 사제가 되어 오신 보좌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명쾌한 복음 강론은 물론 신자들을 다정하게 대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천국의 열쇠>의 치셤 신부님이 우리 본당에 오셨네!’라고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의 본명은 레문도였는데 신부님의 청렴함과 신실함이 본명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열정적인 복음 선포가의 모습으로 청년들과 함께하신 마티아 신부님, 침묵과 인내의 표상이신 바실리오 주교님, 기도와 묵상이 삶 자체이신 베네딕토 주교님, 진리 탐구에 진심이신 스테파노 신부님, 청빈한 생활을 실천하시는 크리스티나 수녀님 등 성인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시는 성직자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일상에 지쳐 용기와 힘을 얻고 싶을 때 제 주위를 둘러보곤 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형제의 병간호에 애쓰고 있는 루치아, 사형제를 키우면서도 인내심과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살로메, 가정 성화에 온 힘을 쏟으며 매일 기도하는 율리안나, 자유인의 삶을 추구하면서도 이웃을 위한 봉사를 쉬지 않는 리베라타, 특별하고 아름다운 옷을 디자인하여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스텔라, 가난한 이웃을 위해 거금을 기꺼이 쾌척하는 헬레나,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환경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안젤라, 엉뚱하지만 어린이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마르티나,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스테파노 ……. 모두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50가지 예수 모습>의 책에 ‘나는 어디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나?’라는 질문이 있는데 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씀과 사람’을 통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게 말씀으로, 사람으로 오십니다. 저는 그분의 현존을 제 주위 사람들의 말과 행동,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느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네. 그분 그리스도이시네.” 오늘따라 유별나게 로고스 찬가가 입안에 맴돕니다.
김혜진(베로니카, 성균관대 학부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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