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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대목구 파견 모방 신부, “조선으로 가고 싶다” 선교사 자원 2024-06-05
브뤼기에르 주교가 머문 복안 정두촌 주교관과 주교좌 성당(위 사진). 목조 건물이던 당시 주교관과 성당은 1928년 태풍으로 소실됐고, 1932년 지금의 성당을 지었고, 현재는 개축된 상태다. 정두촌 성당과 부속 건물.

1832년 일행 14명과 쪽배 타고 복안으로

1832년 12월 19일(혹은 20일) 저는 일행 14명과 함께 중국 복건성 해안 도시 복안현(福安縣)으로 가는 쪽배에 올랐습니다.

일행은 프랑스 바이외교구 출신으로 사천대목구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신부와 카오르교구 출신 프랑스 라자로회 소속 라리브 신부, 강남으로 파견된 에보라교구 출신 포르투갈 라자로회 신부 2명, 포교성성 선교사로 산서로 가는 이탈리아 나폴리교구 출신 프란치스코회 소속 알폰소 마리 디 도나토 신부, 그리고 광동성 출신 중국인 신부 1명 등 선교사 6명과 중국인 연락원 8명이었습니다.(필자 주 - 도나토 신부는 훗날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 지역에 체류할 당시 많은 도움을 주었고, 또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한 후 연락원에게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사실을 알리는 부고 서한을 발송했다.)

복안현은 스페인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선교지입니다. 복건성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이는 박해를 피해 남경에서 장주로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복주(福州)·흥화(興化)·천주(泉州) 등 복건성 남부 연안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1632년 복안에 처음 복음을 전한 이는 도미니코회 안젤로 코치(Angelo Cocchi, 1597~1633) 신부입니다. 이후 1633년 도미니코회 후안 바우티스타 데 모랄레스(Juan Bautista de Morales, 1597~1664) 신부와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안토니오 데 산타 마리아 카바예로(Antonio de Santa Maria Caballero, 1602~1669) 신부가 함께 선교해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습니다. 이때 세례를 받은 나문조(羅文藻, 1616~1691)는 도미니코회 회원으로 중국인 첫 사제이자, 주교가 됐습니다.

마카오에서 복안까지는 대략 790㎞ 거리입니다. 유럽의 배로는 3일이면 당도할 여정을 우리는 75일이나 걸렸습니다. 선장 말만 믿고 한 달치 식량만 장만한 우리는 항해 내내 혹독한 단식을 해야만 했습니다. 돌연 겪게 된 사순절 고행으로 우리는 훨씬 비참해졌습니다.

중국인들은 역풍을 거슬러 항해할 줄을 모릅니다. 중국 배들은 만드는 기술이 나쁘기도 하고, 또 방향을 잃을까 두려워하기도 해 그들은 먼 바다로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육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항해 중 해적들이 출몰하고 대만에서 폭동이 일어나 군인들과 해안을 지키는 초소병들의 검문이 심했습니다.
 
복건교구장 디아즈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안 주교관과 신학교에 머무는 동안 극진히 환대해줬다.

복건대목구장 디아즈 주교 극진히 환대

다행히 우리는 1833년 3월 1일 복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곧장 복건대목구장이 거주하는 주교관으로 갔습니다. 복건대목구장 로케 호세 카르페나 디아즈(Roque-Jose Carpena Diaz, 1760~1849) 주교는 우리를 환대해줬습니다. 그는 스페인 무르시아 출신의 성 도미니코 수도회 선교사로 1791년 중국에 파견돼 1802년 복건대목구 부주교이자 테베스테(Theveste)의 명의 주교로 임명됐습니다. 1803년 2월 말 마카오에서 주교품을 받은 후 병으로 사임한 호세 칼보(Jose Calvo, 1739~1812) 주교에 이어 1812년 10월 복건대목구장으로 착좌했습니다.

74세의 디아즈 주교는 우리를 극진히 대접하고 선교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공급해주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돌봐줬습니다. 그는 저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1833년 11월 이곳에 도착한 조선 선교사 샤스탕 신부도 디아즈 주교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요.

디아즈 주교님은 매우 가난했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아낌없이 도와줬습니다. 가끔 자신이 쓸 돈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쓰시는 것을 보면서 저희가 몹시 걱정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복안은 높은 산과 수로가 많아선지 안개가 잦고 습하며 비가 자주 내립니다. 목조 건물인 주교좌 성당과 부속 건물인 주교관은 복안현 정두촌(頂頭村)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두촌은 장계강(長溪江) 하구 백마(白馬) 항구에 있는 마을로, 강과 바다를 통해 인접한 여러 마을과 중국의 다른 지역을 가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곳을 각자 자기 나라말로 ‘팅 타오’(Ting-tao) 또는 ‘타우 타오’(Tau-tao), ‘탄 타오’(Tan-tao)라 불렀습니다. 중국 교회는 의례 논쟁으로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지만, 복안에서는 그 강도가 덜해 조심스럽게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의례 논쟁을 시작한 곳이 바로 복안인데도 말입니다.

복안은 성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시입니다.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신학생·수도자들이 모두 도미니코회원입니다. 복안 사람들은 상인이요 어부이며 뱃사람들로서 자부심이 강하고 대담합니다. 주민 대부분은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조개와 고기잡이를 하고, 선박 건조와 수리로 생계를 잇고 있습니다. 교우들은 신심이 깊습니다. 특히 여교우들은 삼종 때마다 성당에 와서 묵주 기도를 합니다. 아울러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동정녀도 많습니다.

복건대목구 산타크루즈 신학교는 복안시 계전촌(溪塡村)에 있습니다. 경사진 언덕 위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지요. 맞은 편에는 수려한 골짜기가 있고, 그 아래로 복안강이 흐릅니다. 복안 교우들은 이곳을 ‘작은 로마’라고 부릅니다. 이곳 신학교는 안타깝게도 제가 떠난 다음 해인 1834년 문을 닫았습니다. 1813년 개교해 폐교할 때까지 중국인 사제 7명과 수많은 교리교사를 배출한 곳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복안의 여교우들이 열심해 삼종 때마다 성당에 와서 묵주 기도를 한다고 썼다.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 있어 이곳 여교우들은 삼종 때마다 성당에서 묵주 기도를 하고 있다.

남경 포르투갈 선교사, 연락원 동행 불허

저는 복안에서 1833년 3월 1일부터 4월 27일까지 58일간 머물렀습니다. 주교관과 신학교에서 주로 생활했습니다. 복안에 도착한 지 9일째 되던 1833년 3월 9일 사천(四川)대목구로 파견된 모방 신부가 “조선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제게 밝혔습니다. 그에게 내가 결정권자가 아니니 사천대목구장 루이 퐁타나(Louis Fontana, 1781~1838) 주교에게 허락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퐁타나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모방 신부는 다음날 그의 사목지인 흥화로 떠났습니다. 15개월 후 저는 사천대목구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조선은 우리보다 훨씬 더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모방 신부가 우리 선교지에 와서 자기 열성을 실행하기를 우리는 정말로 원했습니다만, 그가 당신을 따라 조선으로 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는 않겠습니다. 도(왕) 요셉으로 말하면, 나는 당신에게 기꺼이 허락합니다. 이 순간부터 그는 사천 선교지와 맺은 모든 약속에서 해방됐습니다.” 고맙게도 퐁타나 주교님께서 모방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일과 관련해 3월 20일 익명의 한 포르투갈 선교사로부터 항의 서한을 받았습니다. 이 편지에는 “중국 강남 지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브뤼기에르 주교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약속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순진한 모방 신부가 우리와 함께 머물던 포르투갈 선교사 중 한 명에게 자신도 조선으로 가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고, 이미 마카오에서 중국과 조선 교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그 선교사가 남경 주교에게 보고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제게 보낸 것이지요.

1833년 3월 29일 저는 남경교구 총대리 신부로부터 다음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주교님 혼자만 남경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연락원과 동행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총대리 권한으로 배를 억류해 연락원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상대로 중국 땅을 밟자마자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선을 향한 저의 여행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모방 신부의 조선 선교 자원이 제 여행의 첫 걸림돌이 됐습니다. 이제 저는 동료 선교사도 길 안내자요 통역자인 연락원도 없이 혼자서 여행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저는 1833년 4월 23일 남경까지 태워줄 배에 홀로 올랐고, 나흘 후인 27일 남경으로 떠났습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 2024-06-05 오후 3:06:19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