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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구원에 모든 것 바친 선교 사제 삶 들여다보다 | 2024-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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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을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대목구장(교구장)으로 임명돼 조선으로 향하던 중 국경을 눈앞에 두고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신학생 시절에 이미 선교사로서 자신이 파견되기를 바랐다. 당시 부모에게 쓴 편지에서도 “은혜롭게도 하느님 친히 제게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브뤼기에르 주교 바로 알기」는 인간 구원을 위해 선교 사제의 삶을 선택하고 동아시아 대륙 끝 조선으로 ‘순교의 걸음’을 옮겼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더 가까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게 한다. 일대기를 사진과 표 그리고 그가 남긴 글을 통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의 업적과 신앙 유산이 3개의 장에 걸쳐 일목요연하게 담겼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를 비롯한 전국 11개 교구장이 추천사를 남겼다. ‘이 시대에 왜 브뤼기에르 주교일까?’ 한국교회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이후 ‘증거자’로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의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원’(自願)과 ‘용덕’(勇德)이 한국교회를 로마 교회 일원으로 연결해 비로소 세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는 데에 있다. 1801년 박해 이후 ‘30년의 목자 없는 시대’로 지냈던 조선교회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제1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교 열정에서 비롯된다. 그토록 바라고 요청했던 목자를 그의 응답을 통해 찾아낼 수 있었던 때문이다. 그 과정도 극적이다. 그때 교황청 포교성성(현 복음화부) 소속으로 일찍부터 조선 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을 북경 교구에서 분리한 후 담당할 수도회를 찾았다. 파리 외방 전교회(이하 파리외방)에 연락했으나, 파리외방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어 난색을 보였다. 그때 시암(태국)대목구 소속이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교성성과 파리외방 본부에 서한을 보냈다. 익숙해진 시암대목구에서 대목구장직을 수행하는 것이 편했을 것임에도 안주하지 않고, 인력과 재정난으로 파리외방이 꺼렸던 선교 지역에 나서서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상황의 복잡함에 앞서 그에게는 조선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했고 시급한 과제였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암대목구의 페낭을 출발해 싱가포르와 마닐라, 마카오를 거쳐 중국의 만리장성 이북의 서만자(시완쯔)와 조선으로 가는 관문 마가자(마자쯔)에 이르는 여정을 걸었다. 조선 선교지를 바라보며 그는 이런 각오를 밝힌다.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앞으로가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126쪽) 비록 조선 땅을 밟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결단은 파리외방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촉매가 되었다. 또 교황청과 조선교회를 잇는 다리가 됐고, 조선교회가 체계적으로 발전해 나갈 청사진을 제시해 줬다. 오늘날 필요한 사제의 모습, ‘찾아가는 선교 사제’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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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6-05 오전 9:12:07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