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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10주일 2024-06-05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들과 예수님 가족들의 오해와 억측이 빚어낸 사건을 들려줍니다. 긴장감이 역력한 이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으로 몰려든 많은 군중 때문에 요기할 시간마저 없었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라는 표현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집에 머물고 계실 때 두 집단의 사람들이 이 집으로 접근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한 부류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예수 조사단 율법교사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두 부류는 서로 다른 용건을 가지고 왔지만, 목적은 예수님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며 비방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이라는 엄청난 모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모략과 예수님의 치유 활동에 대한 적대적 모욕이 오히려 그분 치유 기적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긴장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 친척들의 행동으로 확대됩니다. 친척들의 반응은 그분이 “미쳤다”(3,21)는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을 직역하면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라는 뜻으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곧 귀신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급기야 친척들은 “그분을 붙잡으러”(3,21) 나섰습니다. ‘붙든다’는 표현이 마르코복음에서 ‘체포하다’라는 부정적 의미로 여러 번 등장함을 볼 때 가족과의 날 선 긴장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오해하고 율법교사들은 그분이 ‘귀신들렸다’고 음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척들에게 그 어떤 대응도 없이 ‘무시’하는 반응을 보이시지만, 율법교사들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시며 다른 듯 같은 반응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의 모함에 세 가지 반증으로 답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3,23),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3,24),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5)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논리의 허구성을 폭로하십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성령의 활동마저 바알의 도움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그들에게, 노골적이며 의도적인 거부는 용서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 또한 퍽 흥미롭습니다. ‘집’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집 안에 있고 어떤 이들은 집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을 두고 ‘안’과 ‘밖’을 나누는 분리가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집 안팎의 공간적 구분은 ‘내부인’과 ‘외부인’에 대한 날카로운 구분으로, 사건 전개의 유용한 계단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척과 율법교사들이 예수님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으로 대변된다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 “주위에 앉은 사람들”(3,34)은 ‘내부인’으로 대표됩니다. 이러한 절묘한 대구는 저자가 어디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외부인은 그야말로 집 밖에 있는 이들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거리두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러합니다. 혈육적으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내부인’이지만,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이 되어버립니다. 율법교사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왔으니 종교적 역할 수행의 중심인으로서 ‘내부인’이라 자부할 수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음해하며 공격하는 이들로서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외부인’이라 지칭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고 주장하며 하느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장벽뿐만이 아니라 율법교사들과 친척들은 외적으로도 집 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집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서 있는’ 율법교사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3,23)하셨고, 예수님의 친척들은 “밖에 서서”(3,31) 예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설전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내부인’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십니다. 이른바 새로운 하느님 가족(Nova Familia Dei)으로서의 ‘새로운 범주’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혈연도, 율법 중심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부인’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마르코에게 있어서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복음이 던지는 질문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힙니다. “당신은 외부인인가요? 내부인인가요? 아니면 내부인 같은 외부인입니까?” ‘내부인’이지만 ‘외부인’이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에 깨어있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가톨릭신문 2024-06-05 오전 8:32:0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