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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절대적 목표가 되면 결국 돈이 주인 자리 차지 2024-05-29
우리는 돈과 탐욕이 얽힌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 끝은 어디일까? 출처=pexels

남자는 ‘트리나’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 후 여자는 복권에 당첨되고 수천 냥의 금화를 침대 아래 숨겨둔다. 여자는 밤마다 그 위에서 구르고 쓰다듬고 애무하며 행복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사업이 망하고 빈털터리가 된다. 그런데 여자는 돈을 감춰두고 남편과 같이 끼니를 굶는다.

남편은 방탕한 삶을 이어가면서 술에 찌들어 여자를 학대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여자는 돈을 지키기 위해 학대마저 감수한다. 마침내 남자는 사랑했던 여자를 살해하고 돈을 훔쳐 달아난다. 그리고 돈을 빼앗으려 달려든 친구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올해 100년을 맞이한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 감독의 무성영화 ‘탐욕(Greed, 1924)''이다.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의 소설 「맥티그」(McTeague)를 각색한 영화다.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아직 강렬하게 남는 한 장면, 주인공 트리나가 행복한 표정으로 침대 위 금화를 끌어안고 쓰다듬고 뒹구는 모습이다. 무성영화라 그런지 여자의 과장된 몸짓과 얼굴 표정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여자에게 돈은 죽음의 위기에서조차 그 어떤 음식이나 물건으로 교환하는 수단이 아니다. 돈은 여자에게 종교이며 인생 그 자체다. 그러니까 여자가 돈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돈이 여자를 소유한 것이다. 마치 강물에 빠진 금을 건지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어 함께 가라앉듯, 탐욕은 끝을 알아도 덫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운가 보다.

현대에서도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내 주변의 현실조차 돈으로 인해 울고 웃는 사람들이 참 많다. 몇 년 전 남편과 이혼한 C는 건강을 잃을 정도로 무섭게 돈 버는 일에 모든 것을 쏟고 있다. “돈 버는 일이 남편에게 복수하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평소 누구보다 부모에게 효도해온 D는 유산 상속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자 배신감을 느끼고 가족과 소원해져 연락을 끊고 우울감에 빠져 산다. 또 자수성가해 돈을 번 F는 예상치 못하게 돈이 슬슬 새어나가는 현실에 무척 불안하다. 그는 줄어드는 돈의 숫자만을 헤아리다 보니 어느새 지상의 막차를 탄 우울한 노인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돈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위험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생명줄을 쥐고 있는 돈이 종종 우상으로 숭배되는 일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돈이 절대적 목표가 되면 당연히 돈이 주인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기에 돈과 나와의 관계는 괜찮은지 자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구는 “내가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냐?”라면서 기죽지 않으려 애쓴다. 또 누구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거짓”이라며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 우리는 돈을 생각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때론 돈 앞에 흔들리기도 하고 굽실거리기도 한다. 돈 때문에 죽도록 공부하고 일도 한다. 돈으로 위로도 받고 상처도 받는다. 돈으로 사랑을 얻고 잃기도 한다. 돈 때문에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돈이 인간의 품위와 자비를 보여주기도 하고, 비열과 비굴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돈은 정말 많은 것을 결정한다.

돈을 모으기만 하고 쓰지 않는 사람이 있고 돈이 많은 것 같은 데도 계속 더 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만족’이라는 것이 있을까? 돈이 얼마나 있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 수백억 원을 가진 사람에게 “이제 충분하십니까?” 묻는다면 기꺼이 “예”라고 대답할지 궁금하다.

이 정도면 됐다 싶다가도 나보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한 사람을 보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돈’에 대한 탐욕의 끝은 어디일까? 탐욕은 칠죄종의 하나다. 탐욕은 모으는 데만 집착하고 베풀지 않는 인색함이다. 돈으로 인해 불의를 행하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 또한 탐욕이다. 만족을 모르고 사는 것도 탐욕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다.

돈은 탐욕을 부추긴다. 탐욕의 돈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인간다움을 잃게 한다. 돈에 묻은 탐욕의 때를 세탁해야겠다. 시인 정호승은 ‘꽃과 돈’이란 시에서 “돈을 벌어야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너무 오래 살아왔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꽃에 묻은 돈의 때를 정성 들여 비누칠해서” 깨끗하게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싶단다.

돈의 때가 묻어 존재로서 피어나지 못하는 꽃, 비누칠하고 깨끗이 빨아 햇볕에 말려야겠다. 돈이 없어도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는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영성이 묻는 안부

포도밭 주인이 처음에 와서 일한 사람과 나중에 와서 일한 사람 모두 똑같은 돈을 줍니다. 그런데 온종일 일한 사람은 이를 부당하게 여기고 불평하지요.(마태 20,1-16) 분명 자신은 약속한 금액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만약 내가 늦게 온 일꾼이라면 불평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돈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손해도 없는데 왜 불만이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온 일꾼이라면 종일 일한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받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할 테고요. 내가 충분히 받았어도 더 받은 사람이 있으면 부족한 것이 되고, 부자여도 더 큰 부자가 있다면 나는 가난해집니다. 그럴 때 내 안에 욕심과 탐욕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05-29 오전 9:52:18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