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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히로시마 상념(하) 2024-05-29

얼굴과 상체에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은 자신의 흉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랜 세월 집에서 숨어지냈다. 어떤 청년은 머리와 손에 켈로이드가 있어서 결혼도 못 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어떤 여성은 젖먹이 때 피폭을 당했고 18년 뒤에 임신했는데 출산 직후 골수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결혼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헤어지는 피폭자 부부도 적지 않았다. 어떤 아가씨는 우연히 병원에서 골수성 백혈병이라 적힌 자신의 진료부를 보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



피폭자들이 받은 끔찍한 고통
후손들에게까지 계속 이어져
인류 역사·문화와 모든 유산에
비극적 종말 초래할 거대한 마물(魔物)



히로시마시 외곽의 자선 시설에 있던 어떤 노인은 피폭자 수첩을 남겨두고 세토 내해의 페리 여객선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에게는 어떤 객관적 원폭증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노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피폭 때 생긴 독, 심각한 원폭증 노이로제에 빠져있었다. 87세의 또 다른 노인은 아들이 피폭하여 죽고, 손자를 힘들게 키우며 도쿄에 있는 대학까지 보냈으나 손자는 원폭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히로시마로 돌아왔다. 손자는 항상 피로를 느껴 누운 채로 지냈고 시력이 약해지더니 신장도 망가지고 백혈구 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얼마 뒤 손자는 안저출혈로 실명하고 한 달 뒤에는 피를 토하고 고통으로 발버둥 치며 울부짖다가 갑자기 조용해져서는 “외로워, 외로워!”라고 말하더니, “아아, 아아, 아아” 세 번 흐느껴 울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노인은 정신 줄을 놓고 멍하니 앉아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손자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스모 최우수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오키나와의 한 건장한 청년은 나가사키 군수공장에서 피폭한 뒤 고향으로 되돌아갔다가 1956년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었다. 스스로 방사능 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 섬에 있는 의사와 상담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의사는 당연히 원폭증에 대해 무지했고 그는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 스모의 요코즈나를 지낸 그는 결국 앉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이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1962년 그는 끝내 피를 반 양동이나 토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그런데도 오키나와에는 그가 원폭증으로 횡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의사가 여전히 없었다. 오키나와 원수폭금지협의회가 만든 리스트에 오른 피폭자 135명 대부분은 많든 적든 신체 이상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의사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불안감을 피로나 노이로제라고 진단할 뿐이었다.


히로시마 지역신문의 ‘히로시마의 증언’에는 원폭으로 자녀 다섯을 모두 잃고, 자신도 목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양팔에 심한 켈로이드가 있는 한국인 노부인에 관한 기사가 났다. 다 찌그러진 함석집에 ‘일본성결교단 히로시마 한국인기독회’라는 문패를 내걸고 살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그 노부인을 ‘미치광이 조선인 할망구’라 부르고, 본인 스스로도 절망하여 예전에는 “원폭을 투하한 미국을 저주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증오했다”고 한다. “그때 하느님의 은총을 입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자살하든지 미치든지 했겠죠.” 그녀는 신앙을 갖고 작고 가난한 교회를 세워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 대다수가 나의 아버지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일하러 갔거나 징용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피폭자 중 생존한 이들은 일본 패전 후 고향으로 귀국하고 오늘날까지 몸과 마음이 골병든 채 원폭증을 앓으며 서서히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는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이들이 피폭자들의 불행과 울부짖음을 전해왔으나 한국의 피폭자들은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아무런 관심도 돌봄도 제공하지 않는 가운데 외로운 고통과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피폭의 고통과 비극은 2세대, 3세대 후손들에게 계승되고 본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원폭증이 지금도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핵무기는 결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생명을 단숨에 학살하고, 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는 몇십 년을 두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속하여 고문하고 괴롭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의 화신은 일찍이 없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모든 힘 모아 연대하고 행동해야



이러한 최악의 독극물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과정과 결정에 관여한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 어떤 책임을 져야 할지,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신들이 탄생시킨 역사상 최악의 작품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와 모든 유산에 비극적 종말을 초래할 거대한 마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마물은 어떤 핑계를 대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의 자식이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한때 냉전의 주체들이 핵무기 감축에 동의하고 함께 핵탄두 해체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오늘도 여전히 1만7000여 개나 되는 마물이 지구 구석구석에 숨어 추악한 자태를 감추고 있다. 이 좁은 한반도 북반부에도 이미 상당수의 핵무기가 똬리를 틀고 있고, 남쪽에도 핵무기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불러들이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광포한 괴물인지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악마의 자식들을 세상에서 쫓아내기 위해 우리의 모든 능력과 지혜와 힘을 다 모아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를 집필해 주신 강우일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24-05-29 오전 9:12:1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