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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실성당 창고 속 빛바랜 성물, 꺼내보니 빛나는 보물이었네 2024-05-29

“고물이 보물이 된다.”

영화 ‘밀수’에 나오는 대사다. 처음부터 값지고 귀한 건 있지만, 보물인 건 없다. 보물은 긴 시간의 흐름 안에서 쓰임새대로 사람들의 손길과 그에 쏟는 정성으로 다듬어진다. 오늘 소개하는 대구대교구 가실본당이 소장해온 보물들도 그렇다. 낡고 쓸모없어 버려져도 아쉽지 않을 만큼 하찮아 보이지만 사제들과 이름 모를 교우들의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귀한 보물이다.

가실본당이 올해 성전 봉헌 100주년을 맞아 고물 창고를 열어 보물 전시장을 꾸민다. 바로 ‘가실성당 역사 전시실’이다. 가실성당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교회 건축물이다. 이에 근대 건축사와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전례를 거행하는 성당과 구 사제관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전례 도구와 제의, 성 미술품 등을 소장하고 있어도 그간 제대로 된 전시 공간의 부재로 소장품들이 방치되고 빛을 발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곧 세상에 드러낼 가실성당의 보물들을 지상에서 먼저 소개한다.




가실성당은 낙동강 옛 나루터 야트막한 동산 위에 서 있다. 동산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행복’의 상징(창세 2,4─3,24 참조)이다. 또 동산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곳(마르 14,32-42)이며 부활하신 장소(마르 16,1-8)이다. ‘아름다운 집’이라는 이름처럼 가실(佳室)성당은 회복과 치유의 장소, 구원의 완성으로 이어주는 터 위에 지어진 하느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거룩한 집이다.

가실본당은 1895년 설립됐다. 1912년부터 31년간 본당 주임으로 사목한 파리외방전교회 빅토르 투르뇌(Victor Tourneux, 한국명 여동선) 신부가 명동대성당 내부 공사를 마무리한 빅토르 루이스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한국명 박도행) 신부에게 설계를 맡겨 1924년 9월 신고딕-로마네스크풍의 성당을 봉헌했다. 주일 교황대사 마리오 지아르디니(Mario Giardini) 대주교가 봉헌식을 주례해 한국 교회에서 교황대사가 축성한 첫 성당이 됐다.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가실성당을 “피정 성당”이라고 불렀다.

이후 1999년 주임으로 부임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바르톨로메오 헨네켄(Henneken, 한국명 현익현) 신부는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가실성당을 새롭게 꾸몄다. 그는 먼저 일제 강점기 때 빼앗긴 ‘가실’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바로잡았다. 일제는 가실성당이 있는 칠곡 노곡면 지역을 낙동강과 금무산의 이름을 따서 ‘낙산’(洛山)으로 바꿔버렸다. 2005년까지 일제의 잔재인 이 이름(낙산성당)으로 불리다가 현 신부가 이를 청산했다.

현 신부는 성당 이름뿐 아니라 100년 된 하느님의 동산을 깔끔하게 손질했다. 간결한 제대와 깨끗한 회벽으로 성당 내부를 어머니 품같이 포근하게 꾸몄다. 그리고 현 주임인 박진형 신부가 올해 9월 성당 봉헌 100주년을 맞아 그 세월 동안 거룩한 공간을 채웠던 신앙의 유산들을 위한 제대로 된 전시실을 꾸미고 있다.



거룩한 공간

거룩한 공간인 성당의 중심은 ‘제대’다. 제대는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대 뒤편에 설치된 가실의 칠보 감실은 에기노 바이에르트(Egino Weinert)의 작품이다. 칠보 감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루카 24,13-35)을 형상화했다. 감실을 감싸고 있는 성화는 하느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간 먹이신 ‘만나’(탈출 16,1-36)를 표현한 것으로 구원의 신비가 성체성사를 통해 정점을 이루고 있음을 고백한다.

회중석 좌우 벽면에는 성상과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가실에는 성당 봉헌식 때 프랑스에서 가져와 설치한 ‘성 안나상’이 남아있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가실성당을 야전병원으로 사용했던 인민군들이 안나상의 심장 부위에 총을 쏴 구멍을 냈다. 전쟁 후 총탄의 흔적을 메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어린 성모님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안나 성상은 성당에 들어선 모든 이에게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성을 느끼게 한다.

‘십자가의 길 14처’도 성당 봉헌 당시 중국에서 가져왔다. 나무틀 속 성화는 도유화가 손숙희(라우렌시아)씨의 작품으로 교체됐다.
 

옛 감실

 

칠보 감실

성 안나상

 

 


전례서와 오르간

가실성당은 오늘날처럼 사제와 회중이 마주하고 응답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전례 방식을 남한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곳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이전에는 사제가 회중을 등지고 제대에서 혼자 라틴말 경문을 읽고 교우들은 그동안 큰 소리로 묵주 기도를 바치는 것이 미사의 풍경이었다.

1952년 북한의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에서 피난 온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가실에 정착해 6년간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이른바 ‘대화 미사’를 시도하고 있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전통 미사 관행을 깨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10년 전부터 교우들과 함께 회중 전체가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는 장을 펼친 곳이 바로 가실성당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사용했던 라틴어 기도문과 제대 촛대 그리고 오르간.

 

 

촛대

라틴어 기도문

 

오르간

 


전례복

사제의 전례복 중 ‘제의’는 ‘예수님의 멍에’를 상징한다. 이 멍에는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래서 사제는 제의를 입기 전에 항상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제의 앞뒤 양면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이 십자가들은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성덕,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표현한다. 그래서 제의를 ‘사랑과 온유, 순결의 옷’이라고도 부른다.
 

 

제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서광호 신부가 가실본당이 간직했던 옛 전례복을 갖추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모습을 재현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제의는 앞면보다 뒷면이 훨씬 화려하다. 회중들이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사를 봉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 볼 수 없는 손영대(手帶)가 눈에 띈다.




성반과 성작

성반과 성작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다. 아울러 고요와 빛에 잠긴 세상 만물을 모두 담아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그릇이다. 이 그릇들에 담긴 거룩한 제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오! 조촐하고 거룩한 신비여, 금빛 못에 신성한 방울방울을 받아 순전한 불이며 순전한 사랑이 저 풍요하고 감미로운 피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고이 담은 그릇이여.”(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의 성작 예찬) 가실성당의 성반과 성작은 장식 없이 단순하고 소박해 더 아름답고 화려하다.
 

 

성작

성반

 

 


성체포와 성작 덮개

성체포는 성작과 성반 밑에 깔려 ‘주님의 수의’ 구실을 한다. 그래서 고운 아마로 제작된다. 흰색 아마는 순결과 고귀함을 상징한다. 순결은 하느님의 은혜다. 참 순결은 처음에 있지 않고 마지막에 있다. 꾸준하고 끈질긴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위아래에서 덮고 있는 성체포와 성작 덮개는 하느님께 대한 굳센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

 

 

성작 덮개


성광과 성체 행렬 닫집

‘강복’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만이 당신 권능으로 복을 내리신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셔 들고 하는 강복은 절정이다. 성체의 신비 앞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에 경건함을 표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서광호 신부와 교우들이 가실성당 성체 행렬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성체 행렬 재현


신심 서적과 교리교재

고된 일이나 먼 길 끝에 고마운 마음으로 앉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신심 서적은 고된 일상에서 한숨 돌리게 하는 ‘쉼’이다. 이 쉼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귀향의 체험이다. 가실성당에는 100년 세월 동안 손때 묻고 믿음을 굳건하게 하도록 정성스레 펼쳐졌던 많은 신심 서적과 교리교재가 있다. 특히 독일에서 가져온 성경 주제 그림과 슬라이드 교재는 복음을 선포하는 데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증거한다.
 

슬라이드 교재

신심서적

 


일상의 흔적

함께 먹는 것은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의 실행이다. 특히 미사 성찬은 모든 이를 하느님과 합일시킨다. 따라서 함께 먹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미사일뿐 아니라 일상의 식사도 축제다. 가실성당의 보물 중 눈에 띄는 것은 미사주를 만드는 데 사용했던 포도 압착기와 간이 오븐, 그리고 커피 그라인더다. 소박한 일상의 도구들이 그 주인의 품위를 드러낸다.
 

 

간이 오븐

포도 압축기

 

 


주임 박진형(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신부의 청원

“가실본당은 1895년 설립된 ‘아름다운 집’(佳室)이라는 마을 이름을 딴 본당 사목구입니다. 올해 9월 성당 봉헌 100주년이 됩니다. 이렇게 역사가 깊다 보니 성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이 유물들은 본당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구 사제관 한쪽에 방치돼 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혹시 유물들이 손상되지 않을까 오랜 고민 끝에 성당 봉헌 100주년을 맞아 현재 사제관 옆 강당에 전시실을 마련해 성당을 방문하는 모든 분이 유물을 관람하시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당은 규모가 작고 신자 수가 적다 보니 많은 이의 도움이 필요로 합니다. ‘가실성당 역사 전시실’ 마련에 도움을 주신 은인들을 위해 한 해 동안 매월 첫째 주 금요일에 미사를 봉헌하고 정성을 기억하겠습니다.”


후원 : 농협 351-1324-9862-03

예금주 : (재)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



글·사진=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4-05-29 오전 8:32:1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