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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김한사 작가 2024-05-23

모든 걸 버리고 나선 도예가의 길


제가 도예를 하게 된 건 팔자인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인 거죠. 그런데 제가 미술을 하겠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반대가 심하셨어요. 집안에 ‘환쟁이’가 나오게 생겼다고요. 그냥 싫어하셨어요. 예술가들은 밥 먹고 살기 힘들다고요. 제가 장남이었는데도, 부모님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좋은 대학에 간 동생들만 잘 지원해 주셨어요. 유학도 보내주시고요.


대학 졸업 후,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시는 부모님의 요청에 도자기 공장 직원으로, 대기업 디자이너로 일하기도 했어요. 월급만 꼬박꼬박 나올 뿐 별 재미가 없었어요. 제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30대 초반에 경기도 이천에 도예공방을 차리고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대학에서는 조소를 전공했는데, 조소의 기본도 도예와 마찬가지로 흙이거든요. 흙으로 하는 거니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30대 초반 이름 없는 작가 작품을 누가 사겠어요. 참 힘들었어요.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어요. 저희 부부 모두 오랜 개신교 신자였어요. 절에도 가고 교회에도 갔는데, 성당이 더 마음이 편했어요. 아마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당에 다니라고 부르신 것 같아요. 먼저 아내가 세례를 받고, 아이들도 차례대로 세례를 받았어요. 제가 제일 나중에 성당에 나가게 됐죠. 아내의 기도가 컸던 것 같아요. 공방에서 작업을 마치고 집에 와 잠을 자면, 아내가 제 머리맡에서 기도했어요. 그게 싫지 않았어요.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천에 있는 성 안드레아 병원에서 봉사를 시작했어요.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에서 운영하던 병원이었는데, 환자들을 대상으로 도예를 통한 미술 테라피를 했어요. 그리고 우연이 포콜라레 영성을 접하게 됐어요. 이천에서 매주 주일 서울 신당동에 있는 마리아 사업회(포콜라레 운동) 본부에 열리는 모임에 거의 20년 넘게 나갔어요. 나중엔 이탈리아 포콜라레 도시 로피아노에서 1년 동안 살고 오기도 했어요. 포콜라레 영성을 통해 진짜 하느님을 알게 됐고,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게 됐어요. 그리고 즐겁게 작업을 하게 됐어요.




도예와 유리공예 접목


제가 도자기를 시작할 때는 1980년대로 도자기 쪽으로 경기가 막 일어나던 때였어요. 아시안게임에 올림픽까지 열리면서 우리나라 도자기 열풍이 불었죠. 그때 많은 사람들이 도자기를 샀는데, 이후에는 경기가 갑자기 죽기 시작했어요. 일본 사람들이 한국 도자기를 많이 샀는데, 한일관계가 나빠지면서 오지 않기 시작했고요. 그런데도 많은 작가들이 이천으로 몰렸어요. 지자체에서 이천을 도자기 중심지로 만들면서 많이 지원도 해 줬죠. 그런데, 당시 도예가들은 박물관에 있는 것들을 그냥 모방해서 찍어내기 바빴어요.


저는 다른 창작품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이천에서 안성으로 공방을 옮겼어요. 그리고 도예에 유리공예를 접목하려 시도하고 있었어요. 그때 어느 날 서울 삼성동본당 주임이었던 고(故) 이영춘(요한 세례자) 신부님이 제 공방에 찾아오셨어요. 이 신부님이 제 작품을 보시더니 이걸 성당 작업에 한 번 접목해 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만든 작품이 지금 삼성동성당 입구에 있는 ‘성가정과 수호천사’예요. 전통 분청사기의 투각 기법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접목시켜 주목받게 됐죠.


이후 성 안드레아 병원 봉사 시절부터 인연을 맺게 된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를 비롯해 여러 곳에 제 작품을 봉헌하게 됐어요. 제주 성 클라라 수도회에서는 이영춘 신부님의 제안으로 공방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수도원의 수녀님들에게 도예를 가르치고, 수녀님들이 직접 성물을 만들어 수도회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모을 수 있도록요. 지금은 제주에는 자주 가지 못하지만 양양에 있는 수도원에 종종 가요. 현재는 개갑장터순교성지 야외 십자가의길 14처를 만들고 있어요. 거의 9개월에 걸쳐 제작해 이제 설치만 남았어요.


하지만 성미술을 대하는 성직자들과 본당 사목회의 모습에는 아쉬운 점도 많아요. 작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작품비의 일부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교회에 봉헌해라’ 이런 식이죠. 가끔은 재료비와 인건비도 안 되는 가격을 책정하는 경우도 있고요. 교회가 작가들을 제대로 대접해야 성미술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지런히 작업활동에 나서 행복감 느껴야


저는 젊은 작가들이 좀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하면 좋겠어요. 선배 작가들이 하는 것을 배우고 전시도 많이 하고요.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해야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자신이 행복한 작업을 하면 좋겠어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행복감을 느껴야 하죠. 작품을 사 가지고 간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둘째 문제에요.


전 성미술 작품을 비롯해 모든 작품을 직접 만들어요. 아르바이트나 조수를 쓰는 작가들 참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알려진 어느 유명한 작가보다 행복하다고 자부해요.



◆ 김한사 바오로 작가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도예가의 길에 나섰으며, 동양의 도예와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접목시켜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팔라초 이심바드리 도예전을 비롯해 일본과 캐나다 등 국내외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고 수십 차례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로마 바티칸 박물관과 캐나다 공예 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가톨릭신문 2024-05-23 오전 10:12:08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