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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깨어있을 수 없다면 틈틈이 시간의 ‘틈’에 머물러야 2024-05-22
점점 ‘틈’이나 ‘사이’에 머무는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빠르게 흘러가는 영상에 그 시간마저 빼앗기고 있다. 출처=언스플레쉬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려야 할 목적지가 있다. 노선을 바꿔서 타든 버스로 갈아타든 목적지를 향해 간다. 그런데 극심한 혼잡시간에도 누구든 잠깐의 ‘틈’은 있다. 그 틈을 이용해 허공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기도 하고,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하고, 심지어 숨 막힐 정도의 비좁은 공간에서 거울을 들고 화장하는 사람도 있다.

분주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문턱인 ‘틈’은 무언가 할 수 있는 ‘겨를’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는 행위는 시간의 가속화로 인해 ‘틈’이란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 일상에 깊이 스며들고 있는 숏폼(Short-Form) 콘텐츠는 질주하듯 빠른 장면의 연속으로 시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잠깐 멈춰 머무는 마음의 정거장인 ‘틈새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60초 이내의 불연속적인 짧은 콘텐츠를 담은 동영상은 밋밋하고 지루할 수 있는 여정의 ‘틈새’를 메우기에 딱 좋다. 숏폼은 짧고 강도가 높고 자극적이고 중독적이다. 부동의 자세로 시선을 고정하고 엄지손가락만으로 빠르게 연속적으로 숏폼 스크롤을 내린다. 빠르고 자극적인 영상에 익숙해진 뇌는 느리고 밋밋한 ‘사이’를 못 견디는 ‘조급한 뇌’로 바뀌기 마련이다.

‘틈’은 숨을 쉬게 하는 작은 간극이다. 어둡고 답답한 공간에서의 ‘창틈’은 숨을 트이게 해준다. 시멘트 콘크리트 계단의 ‘틈새’에서 작고 여린 풀꽃이 고개를 내밀고 생명을 이어간다. 일로, 공부로 과부하가 걸린 뇌에 생기를 불어넣는 ‘놀 틈’이란 것도 있다.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까칠한 사장님도 어쩐지 친근하게 느끼게 해주는 ‘빈틈’이란 것도 있다. ‘틈’은 사이를 만들어줘 머물게 해주고 숨을 쉬게 해주는 쉼 자리다. 우리의 인생도 궁극적으로 가야 할 목적지가 있지만, 지하철처럼 출발지와 목적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 인생길에는 오로지 ‘현재’만이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틈’일 것이다.

인생은 순례자의 여정이다. 목적지만을 향해 가는 관광객과는 아주 다르다. 관광은 보는 것이 중요하다. 관광객은 머물러야 하는 ‘틈’이란 시간이 지루하고 밋밋하고 아까울 수도 있다. 그렇기에 비싼 비용을 들여서라도 가능한 한 빠르고 편하게 목적지로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순례는 온몸으로 경험한다. 그렇기에 순례자는 ‘틈’에 깊이 머문다. 불편하고 지루해도 느리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점점 ‘틈’이나 ‘사이’에 머무는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매일 아침 서둘러 뛰어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간다. 잠시 주어진 ‘틈’에 머물기보다 빠르고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에 빠져 도파민 수치를 올린다. 도파민은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의 빈틈을 파고들어 주의력을 떨어트린다. 머물며 쉴 수 있는 마음의 ‘틈’을 온전히 도파민으로 넘치도록 채우면서 피로를 씻으려 한다. 하지만 도파민 수치는 올라갈수록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게 되고 일상의 밋밋함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어?” “어, 언제 왔어?” “지금 뭐라고 했는데?” 60초 영상을 보다가 2~3시간이 한순간에 지나간다. 의식은 부재중이고 현재는 건너뛴다. 심심해서, 피곤해서, 힘들어서, 지친 감정을 회복하려고 영상을 본다. 하지만 피로에 지친 나를 잠시 잊게 해주는 인스턴트 행복 도파민만 분비될 뿐이다.

지루하고 밋밋하지만 ‘틈’이란 시간에 머물면 평화로운 심신을 유지해주는 천연 행복 세라토닌이 분비된다. 천연 행복은 섬세하고 예민해서 ‘틈틈이’ 돌보고 ‘틈’ 사이에 고요히 자주 머물러야 한다. 사실 멈춰 머물지 않으면 현재라는 시간은 없다. 디지털 마약인 ‘숏폼’으로 자극적인 도파민에 취하면 의식은 가출하고 뇌에 버퍼링이 생긴다. “어, 어디지?” “아니, 벌써?” “아, 그게 뭐지?” 마치 잠을 자듯 몽롱한 상태에서 쫓기듯 서두른다. 그리곤 오로지 ‘보는 것’에만 집중하는 관광객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영성이 묻는 안부

‘틈’만 나면 빠르고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를 봅니다. 그러면 뇌는 또 그렇게 자극적인 것에만 반응할 겁니다. 느리고 밋밋한 주의력을 요구하는 것에 집중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숏폼 콘텐츠는 블랙홀이 되어 현재의 시간과 의식을 빨아들이겠지요. ‘틈’과 같은 ‘문턱’이 있어야 멈추기도 하고 넘어지면서 ‘현재’를 의식합니다. 하지만 스크린에 빠지면 ‘현재’라는 시간을 잃은 영혼의 미아로 살아가지요. 우린 종종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멈춤이 없고 ‘틈새’를 허용하지 않는 시간의 가속화는 ‘현재’에 머물 수 없기에 당연히 시간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시간은 오로지 ‘현재’밖에 없으니까요. 영성의 문은 ‘현재’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현재’에 현존하고요. 어제도 내일도 아니고 ‘지금’입니다. 현재만이 유일하게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늘 깨어 있을 수 없다면, 언제나 항시 깨어 하느님을 의식하고 기도할 수 없다면, ‘틈틈이’ 시간의 ‘틈’에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24-05-22 오전 11:12:16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