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뉴스
- 전체 2건
스스로 파스카의 양이 되신 예수님 | 2024-05-22 |
---|---|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목숨 내놓을 것 선언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대신하는 빵과 포도주 예식 계속 거행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인류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étos)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하느님은 원형이시고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닮은 이콘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5)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의 실제 얼굴도 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카타콤바 벽면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그리스도의 얼굴이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 이콘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방과 서방 교회에 전승으로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그것을 ‘아케이로포이에토스’(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않은 얼굴) 또는 ‘만딜리온’(참된 얼굴, 거룩한 얼굴)이라고 부릅니다. 때는 서기 30년, 예루살렘에는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전국뿐 아니라 근방의 이국 땅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유다인이 모여들었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너희 자녀들이 너희에게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그것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다. 그분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주셨다.”(탈출 12,26-27) 파스카 축제 때 양을 잡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 죽음을 피하고자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를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누룩 없는 빵은 서둘러 이집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선조들의 다급함을 연상케 해 줍니다. 파스카 의식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양의 피는 죄를 깨끗이 없애는 것을, 쓴 나물은 이집트 종살이의 고통스러움을, 누룩 없는 빵은 순결을 상징했습니다. 파스카는 가족 축제로 시작되었지만, 후일 성소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축제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는 1년에 세 번 큰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나와야 합니다. 그 후 양의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대신, 성전에서 사제가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목적은 제단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후기에는 백성의 대표자가 자신과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 제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탈출’이라는 주제는 구약 전체의 시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는 하느님께서 계약으로 맺으신 당신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상기시키는 축제였습니다. 구속에서 구원으로 이어지는 이 축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육체적·정신적·신앙적 억압을 겪을 때마다 변함없는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파스카 의식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파스카의 양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겪으신 때가 파스카 축제 기간 중이었으며 예수님 최후의 만찬도 바로 파스카 식사였습니다. 그림에는 없지만, 틀림없이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와 쓴 나물과 열두 사도와 함께 드실 구운 양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 1)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을 선언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대신하는 빵과 포도주의 예식을 계속 거행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인류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희생 제물이었음을 깨닫고 상징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때의 파스카 사건의 흐름은 하느님의 지혜였으며, 하느님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순례자 중에 그리스인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아마도 에데사(Edessa)에서 온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되는 장면입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지나 동방으로 나가는 관문이 바로 에데사입니다. 구약 성경의 하란(Harran)이 북쪽으로 50㎞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에데사는 오늘날 튀르키예의 우르파(Urfa)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이며 상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습니다. 교회사 자료에는 에데사의 국왕이었던 아브가르 우까마(Abgar Ukkama, A.D. 30)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신하로부터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치유를 베푼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환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4,24) 아브가르 왕 자신도 중병에 걸려 예수님께 치유받고자 했습니다. 아브가르 왕은 특사 하나니아를 통해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께 속히 에데사로 오셔서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움과 박해가 있을 때는 안전하게 보호해 드리겠다고 전합니다. 축제 때 예수님 뵙기를 요청한 그리스인들은 먼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인 필립보에게 청합니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전하고, 이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께 전합니다.(요한 12,20-26 참조)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인들이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찾아온 그 목적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해하려는 모종의 모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에데사로 망명할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권유를 거부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인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3-24) 요한 복음서는 ‘밀알의 말씀’이 대단히 중요하기에 예수님께서 그리스인들에게 하신 그 말씀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브가르 왕에게 전달한 내용은 ''나를 대신하여 제자 한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로 인하여 병이 나을 것''이었다고 전합니다. (작품 2)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는 에데사로 가셨고, 예수님 얼굴이 찍혀있는 수건으로 아브가르 왕의 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국왕을 비롯해 많은 신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비록 외경이긴 하지만 토마스 행전이 에데사 선교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가 누구인지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시나이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소장되어있는 이콘에는 유다로 그려져 있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타대오라는 설도 있습니다. 유다는 야고보와 형제라고 하며, 이름이 비슷한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어 혼동을 피하려고 타대오라는 이름을 쓴다고도 전합니다. 김형부 마오로 |
|
[가톨릭평화신문 2024-05-22 오전 11:12:16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