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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 조선 땅 밟지 못하고 내몽골 마가자에서 선종 | 2024-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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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찾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출발해 중국을 종단하는 여행을 떠난 지 3년 만인 1835년 10월 7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달단(몽골) 땅 서만자에서 1년간 재정비한 끝에 마침내 조선으로 출발했다. 이듬해 1월 조선과 만주 국경지대에서 조선 신자들과 합류,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비밀리에 입국할 심산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그렇게 매년 겨울, 한 명씩 조선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떠난 지 24일 뒤인 1835년 11월 1일, 서만자에 남아 차례를 기다리던 동료 선교사 모방 신부에게 들려온 소식은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0월 20일 저녁 8시 15분경 내몽골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서 선종했다’는 비보였다. 혹독한 추위, 지독한 병마와 싸우며 10월 19일 마가자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찾아온 비극이었다. 향년 43세. 조선 교회 첫 목자는 그렇게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당시 펠리쿠(別拉溝)라고도 불린 마가자는 현재 내몽골 자치구에 속한 적봉시 동산향이다. 서만자교구와 동쪽으로 맞닿은 적봉(赤峰)교구 관할이다. 순례단은 브뤼기에르 주교 발자취를 따라 서만자를 떠나 4월 18일 마가자로 향했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브뤼기에르 주교, 마가자에서 선종 서만자에서 하북성과 내몽골 자치구 경계를 넘어 무려 700㎞쯤 가야 마가자에 다다른다.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서한집」을 펼쳐 브뤼기에르 주교 생애 마지막 순간을 복습했다. 추위로 병세가 심해져 평소 좋아하던 우유조차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브뤼기에르 주교. 생애 마지막 날 그는 저녁 식사 후 머리카락을 땋던 중 돌연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침상에 누워 괴로워하며 불어로 말한 ‘예수·마리아·요셉’이 유언이 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간 고된 여정으로 인해 서만자를 떠나기 전 이미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평지가 아닌 곳을 걸을 때는 15분마다 쉬어야 했고, 두통과 구토로 몹시 괴로워했다. “저는 주교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두려워했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본 모방 신부 표현이다. 비보를 접하고 곧장 마가자에 온 모방 신부가 장례 예식을 주례했다. 장례 미사 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은 마가자 교우들 묘지에 안장됐다. 1835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었다. 모방 신부 요청에 따라 교우들은 무덤에 묘비를 세웠다. ‘탁수(鐸首) 소공지묘(蘇公之墓) 도광 15년 8월 29일립(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立)’이라 새겼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1835년 8월 29일(양력 10월 20일) 선종’이란 뜻이다. 소(蘇)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식 성(姓)이다.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주교 유해가 한국으로 이장된 뒤에도 묘비는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1960년대 문화대혁명에 휘말려 사라진 것으로 한때 알려졌다. 사실 묘비는 이웃 마을에서 섬돌로 쓰이고 있었고, 선종 170년 만인 2005년 발견돼 본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은 비석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순례단, 난관에 부딪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내몽골 자치구 정부가 순례단 진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절차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순례단과 적봉교구 차원에서 각각 방문신고를 했고, 우려할 만한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끝끝내 진입 허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계획했던 마가자와 적봉 주교좌성당 탐방은 무산되고 말았다. 눈치를 살피며 잠시라도 둘러볼 수 있었던 서만자와 달리, 방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특히 새 순례길 개척에 대한 기대가 컸던 순교자현양회 성지 해설사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 원종현 신부가 순례단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순례가 길을 열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속되고 관심을 갖는다면 언젠가 문이 열리겠죠. 그 마음을 갖고 꾸준히 발걸음을 지속합시다. 마태오 복음서 7장 7절을 기억하자고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브뤼기에르 주교가 「여행기」에 남긴 문장이 떠올랐다. “내 계획에 맞서게 될 무수한 어려움에 대해 환상을 키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들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가서 그들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과연 순례단이 지금 처한 상황이 190년 전 브뤼기에르 주교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난관 끝에 고대하던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결국 멈춰버린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오히려 브뤼기에르 주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뜻깊은 순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순례에 함께한 김기혁(베르나르도)씨도 “순례가 계획대로 쉽게 흘러갔다면 오히려 기억에 남지 못할 것”이라며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조선 사랑을 더 깊이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이송로 따라 심양으로 순례단은 마가자를 건너뛰고 다음 행선지인 요녕성 성도 심양(瀋陽)으로 향했다. 공교롭게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발자취를 밟은 셈이 됐다. 앵베르 주교도 서만자에서 바로 심양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전임자를 보고 한겨울 내몽골 초원 지대를 건너는 것이 극히 위험함을 깨달아서다. 심양은 북경과 한양을 오가는 조선 사신들이 반드시 들르는 도시였다. 과거 봉천·묵덴·성경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곳으로, 청나라 초기 수도이기도 하다. 그 위치는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만주 요동(요하 동쪽)이다.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발해가 다스렸던 땅이다. 오늘날에도 동포가 많이 살아 ‘한인촌’이 형성돼 있다. 심양을 찾은 까닭은 1931년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이송로에 속하기 때문이다. 1931년 8월 8일 조선대목구가 동몽골대목구에 협조 서한을 보내고, 10월 15일 마침내 서울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에 유해가 묻히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는 일제가 부설한 철도로 이어져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마가자에서 심양까지 옮겨진 뒤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이동했다. 봉천역(현 심양역)에서 안봉선을 타고 안동(현 단동)역까지 간 다음, 압록강을 건너 다시 신의주역(현 신의주청년역)에서 경의선을 타고 경성역(서울역)으로 향하는 경로였다. 동몽골대목구청이 보낸 유해는 1931년 9월 17일 봉천(심양)교구장 블루아 주교에게 전해졌다. 일제가 심양 근교에서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고작 하루 전 일이었다. 유해는 9월 22일 심양역에서 기차에 실려 조선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틀 뒤인 9월 24일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그렇게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종 96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을 밟게 됐다. 가슴 벅찬 역사의 현장인 심양역은 1910년 지어진 서양식 근대 건물이었다. 지금도 새 역사와 함께 기차역으로 쓰이고 있다. 붉은 벽돌과 청동 돔은 1925년 준공된 옛 서울역(문화역서울284)과 닮았다. 도쿄역을 비롯한 일제 초기 건축물의 특징이다. 만주가 여러모로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심양대교구 주교좌 예수성심대성당은 유해가 서울로 가기 직전 모셔진 곳이다. 이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위한 장엄 미사를 거행했다. 순례단은 1912년 지어진 이 웅장한 고딕 성당에 들어가 중국어 미사에 참여했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신자도 많이 보였다. 40분이 넘는 강론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일부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경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사 후 통역에게 묻자 가정과 국가에 충성하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성당 경내를 둘러보니 ‘중국몽’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등에 관한 문구가 여러 군데 적혀 있었다. 심양에서 유해를 태우고 출발한 기차는 1911년 지어진 압록강 철교를 지나 한반도에 들어왔다. 압록강 철교는 반쯤 끊어진 채 지금도 신의주 건너편 국경도시 단동에 남아있다. 6·25 전쟁 때 중국의 북한 지원을 막기 위해 미국이 폭파한 흔적이다. 지금은 ‘압록강 단교’로도 불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과거와 달리 이젠 건너갈 수 없는 압록강을 바라보며 이번 순례를 되새겼다. 그리고 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압록강 바라보며 브뤼기에르 주교를 생각하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은 결코 실패가 아닌,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그를 대신해 국경으로 향한 모방 신부는 1836년 1월 13일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인 선교사가 됐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선발한 조선인 신학생 중 2명은 훗날 한국인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제가 됐다. ‘피의 순교자’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땀의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다. 모방 신부에 이어 1836~1837년 샤스탕 신부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잇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세 선교사는 목자 없이 30년 넘는 세월을 버텼던 양 떼를 돌보다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 마침내 성인품에 올랐다. 이후로도 더 참혹한 박해를 겪었지만 한국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성장해나갔다. 그리고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선도적인 지역 교회로 거듭났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조선을 향해 떠나며 예언한 바가 끝내 이뤄진 것이다. “가톨릭교회 확장을 바라는 이들에게 조선 선교가 중요시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신앙의 뿌리가 조선에 깊이 내린다면,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거기서부터 복음의 빛이 북쪽 몽골과 조선 인근 여러 섬으로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빛은 예소 섬(홋카이도)과 일본에 두 번째로 비칠 것입니다.”(「서한집」) 2031년은 조선대목구 설정 200주년이다. 이때를 전후로 많은 신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자 할 것이다. 훗날 그들에게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와 떠난 이번 순례가 분명 도움이 될 터다. 190년 전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이 그랬듯이. 「서한집」에 적힌 문구로 순례기를 마친다. “복음의 씨앗이 이미 백 배의 열매를 맺은 이 낯선 땅에서 장차 복음이 크게 발전할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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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5-22 오전 11:12:16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