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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내 삶과 신앙 공동체 중심에 모시고 친교·참여·사명 실천 2024-05-22

다양성 안에서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감’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를 통해 공개된 공식 로고를 보면, 커다란 생명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양성 안에서도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들이 저마다의 모습을 지니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젊은이와 어르신, 남자와 여자, 평신도와 수도자, 건강한 이와 장애인이 그 어떤 위계도 없이 함께 걸어갑니다.

이렇게 ‘함께 걸어감’에 우리가 주목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합니다.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그동안 하느님 백성으로서 함께 걸어오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우리 모두가 어우러져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다짐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의미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라는 커다란 생명나무 아래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여기서 혹시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걸어가는 것이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일까요?
 
춘천교구 서부지구 사목회장단과 모임을 하고 있는 김혜종 신부. 김혜종 신부 제공


신앙인 삶의 태도로서 시노달리타스

신앙인의 ‘함께’는 무엇보다 육화의 신비에 바탕을 둡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이 없다면 신앙인의 모든 ‘함께’는 단지 인간적 친교에 그치고 맙니다. 신앙인에게 모든 ‘함께’의 중심은 항상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고자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을 내 삶과 우리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 모실 수 있음이 시노달리타스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주님과 함께함을 바탕으로 이제 다른 이들, 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과 사랑으로 함께하고자 하는, 또 다른 육화의 신비를 살아가는 모습이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어느 한때 강조하는 교회의 지침이나 신앙 운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교회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이런 주제로 토의한 후에 내놓은 어떤 결과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 시노달리타스는 모든 신앙인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연관된 우리 삶의 태도가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생각이 행동을 결정한다면, 태도는 삶을 결정합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초기 교회의 신앙인들이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해야 할 신앙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노달리타스라는 신앙인 삶의 태도를 본당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를 위해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에서 제시된 주제인 친교·참여·사명에 대해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4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세계가톨릭성령쇄신봉사회 회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에서 환호하는 모습. OSV


함께 걸어감의 실천 – 친교·참여·사명

시노달리타스라는 신앙인 삶의 태도를 살아감에 있어 첫 번째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친교’입니다. 신앙인의 친교는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사랑의 친교를 이루게 되는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서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고 하셨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 12,10)라고 권고합니다.

이 ‘서로’라는 말은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합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거나, 아니면 상대를 이기려고 할 때 이 ‘서로’라는 말은 공동체에서 사라집니다. 먼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음이 모든 사랑과 친교의 바탕입니다. 그래서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이 ‘서로’라는 말은 무엇보다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신자 사이에서 이루는 모든 친교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라는 상호존중의 태도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때 성직자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성직주의의 한계,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친한 사람들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모습을 조금씩 벗어나 참된 신앙적 친교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실천과 관련하여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할 모습은 ‘참여’입니다. 모든 참여의 본질은 무엇보다 ‘들음’에 있습니다. 들음은 ‘서로’라는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상호존중을 실천하는 첫걸음이 되면서, 내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나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내 존재를 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상대를 소외시키거나 수동적인 방관자로 내버려두지 않는 모습이 됩니다. 이렇게 들음을 통해 서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때, 상대의 언어로 전해지는 성령의 움직임을 함께 찾아 나가고 식별하는 과정이 진정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여가 시작됩니다.

이제 들음을 통한 참여와 경청의 모습은 성직자와 수도자·신자들이 구체적으로 신앙 공동체의 ‘목적과 방법, 그리고 결과’를 함께 나눌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어떤 목적을 같이 지녀야 하는지, 어떤 방법과 모습으로 공동체 신앙을 함께 살아갈 것인지, 또 그 결과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성장해나갈 것인지 공유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신앙 공동체의 능동적 참여가 이뤄질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실천과 관련하여 세 번째로 우리가 주목할 모습은 ‘사명’입니다. 사명은 무엇보다 신앙인의 정체성과 연관됩니다. 우리는 세례로 받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사명과 보편 사제직(「가톨릭교회교리서」 1268~1270항 참조)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뿐만아니라 세상과 사회 속에서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이는 이제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온 세상의 모든 구성원과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비복음적 문화를 복음적 문화로, 소비와 죽음의 문화를 나눔과 생명의 문화로 바꿔나감으로써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실 것을 함께 찾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쁨이 이 세상에 가득하도록 만들어 나가는 우리의 사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에페 4,25)

하느님의 모든 백성은 주님의 식탁 아래 모여 모두가 하나의 빵을 나눠 먹고 한마음 한 몸을 이룹니다.(1코린 10,17 참조) 그래서 우리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은 남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만나는 ‘또 다른 나’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로 함께 살아갑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으로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또 다른 육화의 신비를 살아감을 통해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여정이 바로 함께 걸어감의 시노달리타스가 될 것입니다.

 
김혜종 신부
춘천교구 포천본당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4-05-22 오전 10:52:1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