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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 2024-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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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면 늘 비슷한 내용의 강론을 듣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일화입니다. 위대한 교부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골똘히 생각하며 바닷가를 걷고 있었는데 어떤 어린이가 바닷가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 열심히 바닷물로 퍼다가 붓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나고 물었더니 아이가 바닷물을 퍼서 구멍에 다 담으려 한다고 답을 합니다. 성인이 웃으며 작은 구멍에는 절대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으니 헛고생 그만하라고 타일렀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성인에게 말하기를, “맞다! 그러니 당신도 삼위일체 신비를 당신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 하지 말라” 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죠. 한 번쯤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삼위일체는 신학적으로 가장 어려운 교리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교리이니 ‘신비’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는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혀 알 수 없다면 교부들이 어떻게 토론을 통해 그런 교리를 정립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삼위일체가 신비라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미사에서 함께 자주 바치는 사도신경과 간혹 바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신앙 고백은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를 넘어 믿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증언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신비는 성경과 삶을 통해 묵상하고 이를 통해 배운 것을 나의 신앙으로 고백해 볼 때 조금씩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은 아주 짧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사명입니다. 그렇게 사명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삶을 떠 올려 보면 그분은 늘 기도하면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비우며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신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고, 광야로 예수님을 인도하여 아버지의 뜻을 찾게 도우셨습니다. 그런 성령이기에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에게 내려옴을 체험합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진정한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여정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며 애쓰시는지, 우리가 당신의 뜻에 따라 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제2독서는 성령 하느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분이심을, 예수님이 걸으신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심을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마치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된 것처럼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고 계십니다. 성부가 없었다면 성자는 세상에 올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다면 세상은 성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없었다면 성자는 성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으면 성령은 세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세 분 계시다는 이상한 교리가 아니라, 사랑은 함께 협력하는 것이며 일치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은총입니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삼위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론하셨나 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신학적인 내용을 훈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삶의 방식에 혁명을 꾀한다는 뜻입니다. 각 위격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지속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서로를 위해 사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들과 함께 타인들을 위해 살라고 부추기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고, 다른 이들에게 나를 내어줘야 한다고,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한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가? 나는 이를 말로 입증하는가, 아니면 내 삶으로 입증하는가?”(바티칸뉴스, 2022년 6월 12일) 저는 믿습니다. 세상 창조부터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성부 하느님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한 성자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예수님을 닮게 하시는 성령 하느님을 믿습니다. 또한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시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도 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라는 이끄심을 믿습니다. 이런 저의 믿음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삶으로 증거될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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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5-22 오전 10:12:13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