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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히로시마 상념(상) 2024-05-22

한국과 일본 주교단은 1996년 이후 공통의 역사 인식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거의 해마다 각 교구를 방문하며 상대국 문화와 교회 사목 현황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 왔다. 한국 주교단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옛날부터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도 있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기념관도 몇 차례 관람했다. 두 도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에 모든 생명체와 건축물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비극의 현장이다.


1945년 8월 6일 10만여 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이, 8월 9일에는 7만여 명의 나가사키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피폭 생존자들의 증언도 듣고 원폭 투하의 결과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참극을 불러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히로시마 시민들은 참극을 직접 온몸으로 겪은 당사자나 그 후손들로서, 핵폭탄의 공포와 고통을 절감한 사람들이었다.



1945년 日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경험한 세계 유일의 도시
모든 생명과 건축물 잿더미 되고
각각 10만과 7만 시민 목숨 잃어



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을 경험한 세대로 인류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전할 소명이 있음을 확신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는 심정은 수긍하면서도 ‘왜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고 아시아 대륙의 수많은 시민에게 일본이 입힌 가해 책임에 대한 성찰과 사죄는 못 하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전쟁 중 히로시마에는 아시아 대륙을 향한 전쟁의 전초기지와 군부대가 있었고, 나가사키에는 무기와 군함을 건조하는 항만 시설들이 있었다. 미군에게는 당연히 이 두 도시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폭격의 최우선 대상이었다.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 안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먼저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시작한 근원적 책임 의식과 회심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에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최근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씨가 쓴 「히로시마 노트」라는 저서를 읽으며 히로시마 시민들의 원폭 피폭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됐다. 어찌 보면 그 전의 나의 히로시마 인식은 주로 원폭이 폭발한 당일과 며칠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요즘 우크라이나에서, 또는 가자 지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있는가를 각종 보도에서 보고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 노트」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그동안 핵폭발이 가져온 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접하고 있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오에씨의 「히로시마 노트」는 1965년 4월에 쓰였다. 원폭이 폭발한 지 20년이 지난 다음이다. 오에씨 본인은 히로시마에서 거리가 먼 에히메현에서 태어난 타지역 사람으로, 히로시마 시민들의 피폭에 대해서는 평소 그다지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히로시마 시민들을 만나고 히로시마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피폭 히로시마 시민들, 바로 죽지 않고 생존한 피폭자들이 2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겪어간 고통과 죽음, 절망과 침묵을 들여다보며 엄청난 충격과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이 책을 남긴 것 같다. 오에씨는 1994년 노벨문학상을 탄 문인이고 많은 소설을 남겼지만, 그가 쓴 이 「히로시마 노트」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히로시마를 여러 차례 찾고 피폭자들을 만난 후 기록한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세상은 큰 사고나 재앙 발생하면
규모와 사상자 수에 관심 많지만
평생 그날의 공포 안고 살아가는
사고 당사자와 후손 삶 생각해야



보통 큰 사고나 재앙이 터지면 언론은 사고 규모와 사상자 수를 먼저 알린다. 희생자 수가 많을수록 세상은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기억에는 수치들만 남는다. 그러나 피해를 겪은 당사자들에게는 피해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과 트라우마로 시간이 멈추고 인생이 격변하고 세상이 뒤집히는 현재가 지속된다. 제주 4·3사건 관련 유가족, 세월호 유가족,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시간이 멈추듯이 히로시마 피폭자들에게도 원폭 폭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런 현재가 이어지고 있다.



보통 우리가 히로시마 핵폭발을 거론할 때, 폭발 직후 사망자가 10만여 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상자도 10만이 넘었다는 사실은 잘 의식하지 못한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는 298명의 의사가 있었으나 건강한 상태로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의사는 28명, 치과 의사 20명, 약사 28명, 간호사 130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료진 자신들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불안과 무력감에 휩싸여 피폭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히로시마 의사회 원로 마쓰자카 요시마사(松坂義正)씨는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상당한 시민을 구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채찍질해 가며 아들 등에 업혀서 다시 히가시 경찰서 앞으로 되돌아갔다. … 구조라고는 해도 보관하고 있던 자재가 모두 불타고 경찰서에는 기름과 머큐로크롬밖에 없어 모여드는 부상자들에게 화상에는 기름, 상처에는 머큐로크롬을 발라 줄 수밖에 없었다.”


히로시마의 의료인들은 한 번도 배운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원폭증에 속수무책이었다. 많은 부상자가 피폭으로 화상을 입고 피부가 켈로이드 상태로 녹아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들은 전신 피로, 식욕부진, 탈모, 심한 가려움증, 검붉은 피부발진, 궤양 증세를 경험하다 결국은 서서히 죽어갔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가톨릭신문 2024-05-22 오전 10:12:1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