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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밥 한 그릇…"마음의 허기도 채웠으면" | 2024-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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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 성체 수도회(총봉사자 한미란 사비나 수녀) 서울 인보의 집(원장 홍미란 루치아 수녀)은 2022년부터 서울 신림동과 수유동에서 화·금요일 저녁 6시~9시까지 청소년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무료 밥차를 운영 중이다. 고시원이나 원룸이 많은 신림동 밥차에는 취업준비생들이, 오락 시설이 많은 수유동 밥차에는 주로 학교 밖, 가정 밖 청소년들이 밥차를 찾는다. 청소년 주일을 맞아 오늘도 트럭을 모는 홍미란 수녀와 백남실(모니카) 수녀를 찾았다.
■ 대화가 싹트는 곳, 밥상
“저도 수녀님처럼 남에게 베풀고 싶어요. 본받고 싶습니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인 5월 14일. 이날 가장 먼저 밥차를 찾은 민희(22·가명)씨는 벌써 2년째 알고 지내는 수녀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며 30분 넘게 밥을 먹었다.
“네가 정말 최선을 다할 것 같으면 학원비도 대줄 수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 중 생계에 대한 화제로 넘어가자, 수녀들은 민희씨의 미래를 걱정하며 말을 건넸다. 민희씨는 항상 선의로 대해주는 수녀들에게 감동받는다며 음식들을 한가득 싸서 돌아갔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찾는 밥차 메뉴는 토스트를 기본으로 매일 바뀐다. 오늘은 돈가스와 웨지감자, 오므라이스와 군만두다. 평소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는 불고기덮밥, 김치볶음밥, 오징어덮밥, 해물찜 등이다. 특별식으로 여름 중엔 한 번씩 철판에 삼겹살이나 목살을 구워주고 겨울에는 떡볶이에 어묵을 준비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메뉴를 준비하다 보니 늘 잘 먹는 모습을 보게 돼 보람이 있다.
하지만 단골 아이들이 한 번에 3인분씩 먹는 모습을 보면 예쁘고 기분 좋은 한편, 마음이 아프다.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의 돌봄을 충분히 받는 요즘 청소년들은 아무리 성장기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안 먹는데, 거리의 아이들은 마음의 허기가 합쳐져 그런 것 같아 더욱 안타깝다.
“중2짜리 여자애가 어느 날 와서 낙태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수녀님이 미혼모 시설 연결해 줄 수 있으니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말해’라고 해줬죠.” 밥 먹으러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편하게 하다 보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 어려움 중에도 힘이 나는 이유
‘돈이 없어서 어떡하지, 이러다 거덜 나겠다’고 생각할 때면, 하느님께서는 미리 알고 채워주신다. 쌀이 떨어졌다 싶으면 다음 날 신기하게도 쌀이 들어온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다 채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그냥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밥차를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다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초수급자도 소액 후원을 해주고 있고, 폐지를 주워 판 돈을 보내 주는 사람도 있다.
어려움은 체력이다.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고 정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밥차의 특성상, 조리를 하면서 크고 작은 화상과 상처는 부지기수다. 큰 트럭을 운전하다 보니 사고가 나기도 하는데, 한 번은 뺑소니를 치고 도망가는 운전자를 붙잡은 적도 있다.
갑자기 지나거던 행인 한 명이 수녀들에게 음료수 두 캔을 쓰윽 내밀고는 웃으며 지나갔다. 음료를 받은 홍 수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분들이 간혹 있으세요. 덕분에 힘이 나죠.”
■ 신뢰감이 형성될 때의 기쁨
홍 수녀는 한 번씩 식재료를 빠뜨리고 올 때도 있다. 한 번은 재료를 직접 사러 가는 대신 진수(19·가명)군에게 수녀원 법인 카드를 주며 “여기에 집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데 수녀님이 진수 믿고 줄 테니까 계란 한 판만 사다주렴”이라며 카드를 건넸다. 처음 진수는 알록달록한 머리에 거친 아이였다. 하지만 꼬박꼬박 밥을 먹으러 오면서 홍 수녀와 진수 사이에 신뢰감이 형성됐고, 카드를 선뜻 내주고 계란을 부탁할 정도로 믿게 됐다.
진수의 팔에 있는 자해 흔적은 홍 수녀에게도 아픈 상처다. 지금은 잘 오지 않지만 홍 수녀의 부탁으로 생존 확인은 가끔 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오늘 밥차를 찾은 정운(30·가명)씨는 수녀들이 꽉꽉 담아준 오므라이스며 돈가스 등을 챙기며 연신 감사하다고 했다.
“저는 기초수급 청년이라서 수녀님들 밥차 덕분에 살아갈 수가 있을 정도예요. 지금 생활이 너무 어려운데 정말 감사해요.”
기본 메뉴 외에도 유명한 제빵사의 빵이라며 두세 개씩 챙겨주는 수녀들의 손은 바빴다.
■ 여러 기관과 연계하며 자리잡아
“안녕하세요 수녀님, 여기 경찰 될 친구인데 잠깐 같이 일하게 돼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밥차를 찾아온 거리상담 전문요원들이 수녀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2~3분 잠깐 나눴지만 함께 고민한 내용은 모두 보호받지 못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에 대한 것이었다. 5월 31일 신림역에서 연합 거리상담을 진행한다는 정보도 공유했다. 홍 수녀는 오늘 방문한 담당자와 연계됐던 한 아이가 시골로 내려간다며 연락 두절이 됐다는 제보도 했다.
“한 아이에 대해서도 서로 역할이 달라 서울 A지T(담당 은성제 요셉 신부)라든가 서울시 청소년 이동쉼터, 거리상담 등 여러 지역 단체와 연계해 정보를 공유하면서 진행하고 있어요.”
처음엔 밥만 해주려 했다. 그런데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홍 수녀 눈에 아이들의 여러 사정들이 안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일상에도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2022년 시작한 밥차는 자리 잡는 데 3년은 걸릴 것 같았지만 아이들의 입소문과 여러 단체들과의 연계로 1년 만에 어느 정도 터를 잡았고 이제는 3년 차가 됐다.
■ 아이들 곁에서 묵묵히 기다림
특히 마음을 열기 어려운 청소년 사목, 이에 대한 어려움을 홍 수녀는 서정주(1915~2000)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로 대신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힘들지만 아이들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시간, 성모님처럼 바라보고 묵묵히 기다리는 시간을 뜻하는 것 같아요.”
2년 넘게 통성명도 안 한 채 마음을 닫고 있다는 이들부터 검정고시를 통과하거나 취업에 성공해 인사 온 이들까지. 수녀들은 이 모두를 품어주며 그저 밥 먹고 가라고 토닥인다.
※ 문의: 02-793-9178 서울 인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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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5-22 오전 9:52:15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