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V
“당신께서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요나 2,3)
세상은 온갖 ‘소리’들로 가득합니다. 세상 창조의 시작도 실은 거룩한 ‘소리’인 말씀이셨습니다. “빛이 생겨라.”(창세 1,3) 그래서 요한 복음 사가는 한 처음에 ‘말씀’인 소리가 계셨다는 말로 긴 복음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요한 1,1 참조)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의 엄청난 역사는 모두 말씀인 ‘소리’로 이루어집니다. 아기의 새 생명이 세상에 탄생할 때 큰 울음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창조의 신비를 많이 닮았습니다. 아기는 눈을 감고 세상에 태어났어도 온갖 소리에 민감합니다. 심지어 엄마 뱃속에서도 소리를 듣기에 태교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기가 눈을 뜨고 들리는 소리의 근원을 알기 위해 연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입니다. 때문에 두 귀를 가진 인간의 시작은 ‘듣는 것으로부터’라는 작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기는 들리는 소리에서 반복적으로 듣게 되는 익숙한 소리를 기억하게 됩니다. 나아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가장 익숙한 엄마의 소리를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를 가장 먼저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 역시 거룩한 소리로 가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말씀의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길을 떠납니다. 모세 역시 거룩한 부르심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소명을 시작합니다. 이렇듯 성경의 내용은 거룩한 소리(말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고통과 번민의 강이었던 광야 생활이 끝나갈 무렵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신명 4,7)
이처럼 우리가 소리쳐 부를 때, 우리의 가엾은 소리를 들어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잊지 말자고 그토록 강조하고 상기시키는 하느님 백성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입니다. 그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하느님의 거룩한 소리,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옛날 시편의 시인은 거룩한 소리의 말씀을 이처럼 아름답게 풀이해 놓은 것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2-5)
구원의 완성자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천사 가브리엘의 거룩한 인사 소리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지상 복음적 삶도 거룩한 소리인 말씀 선포로 시작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그리고 구원사업을 완성하신 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마지막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성령강림에 의한 교회의 시작도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사도 2,2)였다고 루카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창조의 위대한 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태양이 떠오를 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인사 소리, 아이들의 티 없는 웃음소리, 넘실대는 파도 소리, 장엄한 천둥과 벼락 소리, 시원한 소나기 소리.
이 모든 소리는 서로가 창조의 거룩한 울림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들의 소리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침묵하는 책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하느님 사랑의 말씀을 내게 건네시는 거룩한 소리인 것입니다. 그 거룩한 소리에 우리가 경청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예레 20,9) 것을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뜨겁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이 느꼈던 삶의 체험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제 인생의 전부는 매일 매일이 주님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응답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제가 슬피 울부짖거나 소리쳐 주님을 부를 때마다 주님은 늘 제 소리를 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배광하 신부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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