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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신앙인들의 영성체 2024-05-16

이탈리아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성체 기적 경당 프레스코화


중세의 전성기에 열린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성체에 관하여 중대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실체변화’(實體變化, Transubstantiatio)라는 단어가 교회의 공식 문헌 안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공의회는 ‘실체변화’에 관하여 언급하면서(실체변화의 의미와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설명할 예정이다) 정당하게 서품된 사제만이 성체성사를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더욱이 신자들의 영성체가 너무나 드물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곧 부활절 때 성체성사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교회법으로 정하였다.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도 이때다.

이같은 규정들이 많이 나타난 것은 당시 성체성사에 관하여 여러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평신도의 성혈 배령 문제였다. 초기 교회에서는 주님의 행하신 모범에 따라 모든 신자들이 성체와 성혈을 모셨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성체만을 배령하고, 성혈은 모시지 않는 관습이 굳혀져 갔다. 그러나 14세기에 이르러 평신도들도 성혈 배령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 문제를 1415년 개혁 회의라 불리는 독일 콘스탄츠 공의회로 해결했다. 교회는 전통적인 관습에 비추어 편의상 이유로 한 가지 양식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했다.

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성체성사와 관련한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영국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이론과 관련한 것이다. 위클리프는 사물의 실체적 변화(實體的 變化)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성체에 있어서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위클리프는 또한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미사성제를 제정하였다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가르침은 영국에서 열린 몇몇 교회 회의에서 논의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 오류가 지적되었다.

교회는 더 나아가 1439년에 열린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성체성사에 대한 중요한 몇가지 교령을 공표하였다. 그 중 중요한 것이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교령이다. 여기서는 성체성사가 동방과 서방의 각각의 다른 전통에 따라 누룩이 들어간 빵이든지 또는 누룩이 들지 않는 빵이든지 어떤 빵을 가지고서도 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 피렌체 공의회에서 또 중요한 것은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추구한 아르메니아 교회를 위한 교령이다. 이 교령은 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짧은 저서 「교회의 신앙과 성사에 대하여」 (De Fide et Sacramentis Ecclesiae)를 인용한 것이다. 이 교령은 공의회가 발표한 신앙 선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공의회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아르메니아에 보낸 것으로 성체성사의 신학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찬례를 위하여서는 밀로 만들어진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고(materia) 또 그 포도주에는 약간의 물을 섞어야 한다. 물을 섞지 않는 것은 타당치 않다. 또 성체성사를 축성하는 말(forma)은 사제가 하는 그리스도의 말이다. 그리고 축성에 의하여 빵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는 각 형태 아래 전체로서 현존하고, 그 빵과 포도주의 형태가 나누어질 때 각 부분 속에도 그리스도가 전체로서 현존하고 있다. 특히 성체 배령의 결과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며 은혜의 증대이다. 보통 양식과 음료는 인간 육체의 생명의 유지, 증대, 체력의 회복, 즐거움 등을 가져오지만, 성체는 인간의 영혼에 그런 모든 것을 가져온다고 밝혔다. 이처럼 교회는 계속해서 성체성사의 중요성과 그 교리에 대해 강조해 왔다. 하지만 문제점 또한 지속적으로 부각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 즉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전의 성체성사 거행의 주요 문제점들에 관하여는 P. 네메세기의 「주의 만찬」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성찬례 거행의 주요 문제점을 든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별 성찬례 집전이 늘어남에 따라 사적 미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둘째, 초세기에 평신도들도 성혈을 배령하던 것이 신자 수의 증가와 위생상의 이유, 그리고 성체와 성혈 어느 하나의 형상 안에도 주님께서 온전히 계신다는 스콜라 신학의 영향 등으로 평신도들은 성혈이 아닌 성체 배령에만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12세기 이후 성체에 대한 신심이 증대하게 되면서 성체께 대한 경배예식이 다양하게 생겨나고, 성체거동 및 성체현시의 예식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아울러 성체께 대한 과도한 경외심으로 신자들이 영성체를 하기를 꺼리는 현상이 생겼다는 점이다.

넷째, 교리지식의 미흡과 물량적 신심으로 성체께 대한 순수한 공경보다는 과도한 부담감을, 감사보다는 청원을,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는 기복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나타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극복되었을까.

자! 이제 가톨릭교회를 살렸던 개혁 공의회,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립한 성체성사 교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글 _ 전합수 신부 (가브리엘, 수원교구 북여주본당 주임)
1992년 사제수품.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한국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수원교구 청소년국 청년성서부 초대 전담신부, 수원교구 하남, 본오동, 오전동, 송서, 매교동본당 주임을 지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05-16 오전 9:12:05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