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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환경이자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 2024-05-08

‘스마트 글라스’ 등 인공지능 기술을 탑재한 기기를 신체에 부착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생태학적 측면에서 사유하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Wikimedia Commons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가 오히려 더 좋았어. 그래도 그땐 잠깐이라도 눈을 뗄 수 있었잖아.” 머지않아 지금의 현실을 그리워할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때는 오랜 시간 하염없이 바라보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차라리 텔레비전 볼 때가 좋았어. 그나마 가족이 함께 한곳에 있었잖아”라는 생각을 하니 말이다.

가까운 미래에 전화·길 안내·번역 등 무엇이든 물으면 척척 대답해주는 ‘스마트 글라스’를 착용하는 세상이 온다고 한다. 스마트 기기를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고 눈에 컴퓨터를 장착한다는 말이다. 최근 들어 IT기업들이 모두 스마트 글래스 개발 경쟁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스마트 글라스가 모든 사람들 눈에 쓰일 것이란 전망이다. 최근 메타(Ray-Ban Meta)가 스마트 안경에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한 증강현실 ‘AR 글라스’를 공개했다. 메타의 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AI가 탑재된 글라스를 쓰고 질문하면 안경이 사물에 대한 정보를 척척 제공해주는 모습을 선보였다. 그는 빠른 시일 내 최첨단 안경으로 순간 이동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잠시 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자기기를 몸에 착용하는 웨어러블(wearable) 글라스는 몸의 일부가 된다. 더욱이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는 인공지능이 작동하면서 완전히 몰입하게 하는 증강현실을 경험한다. 가상현실과 현실을 결합한 진짜인 듯 가짜인 강력한 몰입을 만들어내는 증강현실이 평범한 일상이 될 수도 있겠다. 지금의 스마트폰은 몰입하다가도 현실과 타인과의 문턱을 오가기도 한다. 하지만 스마트 글라스로 인해 안경 너머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경 안에 갇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며 미디어 생태학 주창자인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은 “미디어는 단지 도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했다.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미디어는 환경이자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영향을 준다. 강을 생각해보자.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강이 오염되면 물고기가 죽어 나가고 주변 생태계가 파괴된다. 그 변화는 결국 나를 포함한 생명 전체를 위협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염된 강도 여전히 ‘강’이라 부르며 물놀이도 하고 그 물을 마시며 산다.

커뮤니케이션 도구도 마찬가지다. 나 홀로 잘 사용한다고 좋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폐해까지 모두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아주 서서히 일어난다. 그래서 알아채지 못한다. 변화는 미세하게 일어나고 점차 둔감해진다. 문자에서 인쇄로, 텔레비전으로, 그리고 스마트폰·스마트 글라스로 미디어 형식이 바뀔 때마다 우리 생각과 마음이 각기 다른 형태와 파장으로 출렁거리고 변화된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수용하고 반복하면서 일상이 된다. 인간과 미디어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보 교환을 넘어 인지체계에 영향을 주고 삶의 방식과 신념·가치까지 변하게 한다.

인공지능까지 탑재된 스마트 기기를 신체에 부착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생태학적 측면에서 사유하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인간 본성이 언제나 분별력 있고 합리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인공지능과 스마트 기기는 우리의 깊은 심리적 역동과 어우러져 춤을 추는 동반자가 되었고, 도망가 숨을 수도 있는 도피처가 되었다. 분신처럼 되어버린 도구로 인해 어느 순간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시편 135,16-17 참조) 기계가 된다. 결국 기계를 신뢰하는 자들 모두 기계와 같이(시편 135,18 참조) 되고, 급기야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인간과,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 인류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지혜를 구하자”(제58차 홍보 주일 담화)는 교황의 외침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때다.


영성이 묻는 안부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Day of Social Communications)입니다. 의사소통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일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 나눔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이라고 해야 할까요? ‘Communication’에는 공동체·공유·나눔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누며 하나 되는 성찬례인 ‘Holy Communion’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지요.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소통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공통의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집은 있어도 가족은 떨어져 있고, 성당과 수도원은 있어도 공동체는 흩어집니다. 시간과 땀을 나누는 공동의 경험보다 가상현실의 경험을 더 많이 하는 것은 아닌지요? 느리고 밋밋한 현실에서 벗어나 빠르고 강력한 스펙터클의 스크린 세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닌지요? 손 안의 스크린이 이제 착용하는 안경으로 옮겨간다면 우리 공동체는 또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갈까요? 공동체가 없는 증강현실을 통해 어떻게 “마음의 지혜를 찾고 하느님을 만나는 내적 자리인 ‘마음’”(홍보 주일 담화)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24-05-08 오전 11:12:05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