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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신부, 1836년 소년 3명 뽑아 마카오 신학교로 유학 보내 2024-05-08
세 신학생의 마카오까지 여정

현지인 사제 양성 위해 신학생 선발

정하상(바오로)의 순교로 국내에서의 한국인 사제 양성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방 신부는 이미 1836년에 한양에 거처하면서 3명의 소년을 뽑아 라틴어 기초교육을 하고, 한겨울에 육로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는 모방 신부의 모습이 그의 편지에 전해진다.

“?나는 도착 후 즉시 유(파치피코) 신부에게 그가 말한 2명의 학생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나는 홀아비로 더없이 게으르고 공부를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집을 뛰쳐나온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신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교인인 그의 아버지가 약혼시킨 그 외교인 여자와 결혼하도록 관면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은 제가 약간의 소년들을 공부시키고자 하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벌써 한 달 이상 저와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서양말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일 처음 도착한 소년은 ‘최 토마스 양업’이라 하고, 다음은 ‘프란치스코 과출(Kouatchouri)’이라고 합니다.”(1836년 4월 4일, 한양. 모방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편지)

모방 신부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방침 제일 우선순위인 현지인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생들을 선발하였다. 유방제 신부가 미리 선발해놓은 두 젊은이는 신학생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하상을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최양업과 최방제 소년을 추천하였고, 나중에 김대건도 예비신학생에 합류하게 돼 세 소년을 유학 보내게 되었다.
마카오 조선 신학교 교장으로 세 조선인 신학생에게 교리와 교회 음악 등을 가르친 칼르리(Callery, 1810~1862) 신부. 1841년 파리외방전교회를 탈회하고 프랑스로 귀국해 환속했다. 사진은 1845년 찍은 것이다. 출처=위키피디아

최양업·최방제에 이어 김대건 신학생 합류

세 소년 가운데 라틴어 기초 과정이 끝난 2명만 먼저 유학을 보내려다가 김대건도 함께 보내면서, 세 소년에게 서약서를 받게 되었다.

“조선 소년 2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또 기회가 없을까 걱정이 되어 비록 저하고 4~5개월밖에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소년을 추가로 같이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교우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합니다. ?이 소년들은 온순합니다.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과 순명으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1836년 12월 3일, 한양. 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세 소년이 서약한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다. 곧 ‘장상에게의 순명’과 ‘장상의 허락 없이 다른 회에 들어가거나 다른 장소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와 조선 포교지의 후계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나와 조선 포교지의 나의 후계자들인 장상들에게, 장상에게 신청하여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다른 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또는 장상이 지적한 장소 외에 다른 장소로 가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1836년 12월 3일 성경에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받았습니다. 모방, 조선 선교사.”

그들은 한겨울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내륙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페낭에는 동아시아 지역의 사제들을 양성하는 신학교가 있었다. 마카오 지부 부대표였던 바랑탱 신부는 3명의 조선 신학생을 보고 “이 학생들은 놀랄 만큼 순박해 보입니다”라고 첫 인상을 얘기하면서, 페낭 신학교가 ‘파벌과 교만과 비판 정신’ 등으로 환경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마카오 극동 대표부에 임시로 신학교를 마련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조선 선교사로 보낼 예정이었던 칼르리 신부에게 세 명으로 이루어진 임시 신학교의 교장 역할을 맡겼다.
 
청주교구 배티 순교성지에 전시 중인 풍금.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전한다. 출처=배티 순교성지 홈페이지

가장 뛰어난 최방제, 위열병으로 세상 떠나

조선 신학교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 칼르리 신부는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파리 본부에 청하였다. “잡지·수준기(水準器, 수평선 또는 수평면을 구하기 위한 기구)·기압계·최고품 연필 3다스·한자가 새겨진 기적의 메달·자명종. ?이 학교의 교장이 된 나는 동시에 이 가엾은 소년들의 교사요 지도자요 아버지요 의사입니다. 나의 조선 소년들의 목소리가 매우 쉰 목소리이고, 완전히 음정이 맞지 않는 목소리라고 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회 노래와 성가들을 가르쳐 좀 고쳐볼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 4~5피아스트르 값의 손풍금이 있으면 아주 좋겠습니다.”(1837년 10월 4일. 칼르리 신부가 파리 신학교 트송 신부에게 보낸 편지)

비록 3명으로 이루어진 임시 학교이지만 첫 번째 교장 선생은 신학생들을 위한 학용품과 생활용품을 꼼꼼히 챙겼다. 그들을 위해 최고급 연필 3다스와 학생들의 목소리 교정을 위한 손풍금까지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라틴어와 교리 교육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중 나이도 한 살이 더 많고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라틴어 공부에서 보인 진전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식사 동안 그는 성경을 알아듣게 낭독하였습니다. 이렇게 벌써 우리가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게 되었을 때, 지난달 중순경에 위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예절이 끝난 후 나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비에르는 나의 손을 잡고 ‘그라시아스 파트리’(Gratias Patri, 신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그의 고상을 입에 갖다 대고 ‘착한 예수! 착한 천주!’라고 되풀이하였습니다. ?이어 우리의 성스러운 젊은이는 그의 천주님 곁으로 가기 위해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칼르리 신부의 서한 중에서)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 사제로 양성

이제 남아 있는 신학생들은 김대건과 최양업 둘뿐이었다. 그들이 초기에 교리를 어떻게 배워갔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토마스는 아주 건강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거의 언제나 두통이나 요통을 앓습니다. 성장이 그 원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나는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토마스는 천주 성삼의 제2위인 성자가,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능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제1위인 성부보다 덜 능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대죄만은 모두 고해해야 하지만 소죄는 고해할 엄격한 의무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가 그들을 우롱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1839년 6월 23일, 리브와 신부)

조선에서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있었을 때, 이렇게 두 소년은 훌륭한 사제가 되기 위해 성장하고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가톨릭평화신문 2024-05-08 오전 10:52:04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