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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함께 걷는 시노달리타스, 교회가 닿아야 할 목적지며 본성 2024-05-08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두초 디 부오닌세냐, 템페라, 1311년, 43.5×46cm,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주님과 함께 걷는 기쁨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체험입니다. 누구나 기쁘고 즐거운 체험은 이웃에게 전하고 그 체험을 함께하자고 초대합니다. 우리말 동행(同行)의 의미를 지닌 시노드는 하느님 백성이 그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리고 이 시대와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주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길을 토론할 때,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셔서 함께 걸으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면 우리와 함께하여 주십니다. 또한 “주님만이 저희를 이끄시니 저희와 함께하시고 저희 마음에 머무소서”(시노드를 위한 기도)라고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친교를 이루면, 함께하는 이들 안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경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알아차릴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찾아낸 이들은 주님의 뜻을 은총 안에서 실현하는 소명을 지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걸으면 복음화되고, 복음화된 이들은 선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같은 길을 걸으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함께 걷는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깊이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이와 늘 함께하면 그를 닮아가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걷기 위하여 주님을 늘 찾고 따르다 보면 주님과 함께 걷는 일이 일상의 자연스러운 습관(시노달리타스)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복음화 된 이들은 차고 넘치는 기쁨을 이웃에 전하고 세상에 선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복음화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9항) 즉 복음화된 이들은 선교하는 이들이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오히려 기뻐했던 사도들처럼''(사도 4,41 참조)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주님을 닮게 된 이들의 선교는 ‘기쁜 소식’이 되고 그 무엇도, 심지어 박해와 죽음의 위협도 그들이 선교할 권한과 의무를 그리고 그 기쁨을 그들에게서 앗아갈 수 없습니다.



복음화된 이들은 기쁘게 선교합니다

복음화된 이들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주님과 늘 함께하면 그분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주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주기”(「복음의 기쁨」 1항) 때문입니다. 도대체 누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부활하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신 분과 함께 걷고 있음을 체험하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감각적인 기쁨과는 다른, 영혼이 누리는 충만함입니다.

기쁨이 없는 엄숙함과 경건함은 전파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감각적 기쁨이나 가장된 기쁨을 조장하려는 유혹에도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기쁨은 결국 쉬이 사라지고 더 자극적인 기쁨만을 헛되이 갈망하게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기쁨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우리의 영혼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그 본성상 자기 안에 숨겨 둘 수 없어 ‘지붕 위에서라도’ 이웃에 전하고 세상에 선포하려 합니다.

때로 선교는 교리를 전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는 먼저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후에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에게, 혹은 복음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뒤따릅니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교리를 이웃에게 전하는 것은 두려워하며 주저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라 전했던 것’(요한 4,1-42 참조)처럼 예수님을 만난 놀라운 체험은 주저하지 않고 이웃에게 전하게 됩니다.



시노달리타스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있음을 늘 체험하는 것입니다

시민사회에서도 시노드라는 말로 회의를 열거나 모임을 하지만, 시노드는 특별히 교회의 회의를 지칭합니다. 교회는 다수결로 우리가 함께 걸어갈 길을 결정하지 않고, 언제나 주님을 우리 가운데 초대하고, 성령 안에서 주님과 친교를 이루며, 함께하는 이들의 목소리 안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뜻을 경청하고 식별하면서 소명을 찾아 따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 1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쁨으로 두드러진 새로운 복음화 단계로 들어서도록 격려하면서,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걸어갈 새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라고 천명하시면서 특별히 교회의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드는 ‘선교 선택’을 원하셨습니다.(「복음의 기쁨」 27항) 본당이 ‘공동체들의 공동체로서’ 살아 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소’가 되고 구성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교육하며, 지속적인 선교 활동의 중심지로서 온전히 선교를 지향해야 함을 요청하셨습니다.(「복음의 기쁨」 28항 참조) 그리고 기초 공동체와 소공동체들, 여러 운동과 단체들이 모든 영역과 분야를 복음화하고자 성령께서 불러일으킨 교회의 풍요라 하셨습니다.(「복음의 기쁨」 29항)

특별히 소공동체 복음 나누기는 작은 교회 공동체의 시노드로서 신자들이 ‘시노달리타스 교회’를 확실하게 체험하는 장입니다. 1단계에서 교회 공동체 모임에 참여하여, 주님을 초대하고 주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느끼며, 2단계에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고, 3단계에서 나에게 닿은 복음 말씀을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선포합니다.

그리고 4단계의 묵상 가운데 주님을 체험하고, 5단계에서 체험한 주님에 대해 서로 나누고 경청합니다. 6단계에서는 우리 안에서 식별해 낸 주님의 뜻을 ‘생명 말씀’으로 정하고, 공동체와 개인이 실천해야 할 소명을 정합니다. 그리고 7단계에서 함께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지역의 선교를 위해 파견됩니다. 이렇듯 하느님 백성은 작은 교회 공동체의 복음 나누기 안에서 일상적으로 주님과 함께 걷는 것(시노드)을 반복해서 체험하고 체득하게(시노달리타스) 됩니다.

제자들의 공동체가 예수님 없이 풍랑에 휩쓸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시며 다가오셨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 6,21) 주님과 함께 걷는 시노달리타스의 교회는 어떤 목적을 향한 과정이 아니라, 늘 주님과 함께 걸어야 하는 교회가 닿아야 하는 목적지이며 교회의 본성입니다. 교회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걸으며 그분의 뜻을 실행하면 교회의 선교 사명은 충만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6)
 
 
황태종 신부
제주교구 김기량본당 주임
전 제주교구 선교사목위원장
[가톨릭평화신문 2024-05-08 오전 10:32:05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