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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사람과 사람을 잇는 친교의 도구이며 희망의 등불 | 2024-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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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홍보부 파올로 루피니 장관은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창립 36주년을 축하하며 cpbc를 비롯한 교계 언론이 복잡다단하고 진실을 가늠하기 어려운 현 시대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친교의 도구’로서 희망의 등불이 될 것을 당부했다. 루피니 장관은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기술 발전 속에서 교계 미디어가 더욱 ‘사람’과 ‘공동체’, ‘인본주의’ 시각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휴머니즘을 구축하는 데 앞장서 달라”고 제언했다. 루피니 장관은 보편 교회의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관장하는 교황청 부서 평신도 장관으로서 cpbc가 제시한 질문에 A4용지 1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답해왔다. 본지는 교계 언론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디어가 함께 숙고해야 할 내용이라 여기고, 지면에 답변을 최대한 담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번역=고영심(모니카) 박사
정리=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 창립 36주년을 맞은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을 위한 축하 인사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cpbc 여러분, 창립 36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36년은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특히 ‘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분은 끊임없이 평화와 희망·빛을 찾고자 노력해왔습니다. ‘cpbc’가 된다는 것은 문제없는 세상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열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제58차 홍보 주일에 cpbc의 창립을 기념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하는 기술의 시대에 마음의 지혜를 회복하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만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움을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며, 온전한 인간소통을 위한 길을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증거에 감사하는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가 되기 위해 삶의 긴 여정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용기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친교의 힘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때로 어두운 밤과 비슷해 보입니다. 전쟁의 시간은 우리를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하게 만듭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는 것인지 자문하기에 바쁩니다. 아니면 뒤로 떨어지고 미래가 없는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시대의 전환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죽어가고 또 새로운 세상은 탄생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나쁜 조언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도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회를 포착하기를 바라며 삶의 중심을 잡기를 바랍니다. 두려움 없는 시선으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들을지 아는 사람들처럼 의지와 자유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깨끗한 ??공기’를 다시 순환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령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우리를 일치시키는 친교에 우리 자신을 의탁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숨을 쉬고 정신과 영혼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겸손하게, 매사 열정을 갖기를 바랍니다. 루피니 장관은 2022년 서울 시그니스 세계총회(Signis World Congress 2022) 때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그는 cpbc 본사를 방문해 신문·TV·라디오 부서를 두루 방문하며 교계 언론 종사자로 활동하는 직원들을 격려한 바 있다. 아울러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를 비롯해 한국 주교단을 만나고, 한국 교회 모습을 둘러봤다. - 2022년 방한 당시 본사를 방문했을 때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요? 마치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처럼 환영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폭넓은 사고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통일된 비전과 시청취자·독자들과 깊은 유대감을 바탕으로 관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봤습니다. 그리고 참다운 아름다움에 대한 여러분의 목마름, 진리와 선함과 은총을 나누고자 하는 여러분의 열망에 감탄했습니다. - 당시 한국 교회를 직접 보신 소감도 궁금합니다. 로마는 2000년 전부터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린 곳입니다.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저는 아주 젊은 교회를 마주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가 평신도에서 비롯된 역사에 놀랐습니다. 한국 교회가 보여준 모습에서 시노달리타스를 목격했습니다. 보편 교회(Chiesa universale)에 이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저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순교자들이 많은 이에게 신앙의 씨앗을 뿌렸고, 그 열매가 맺힌 한국 교회의 역사를 듣고 감동받았습니다. 사랑과 인내로 이뤄진 이 신앙,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 속에 스며든 이 기억이 오늘날에도 한국 국민이 끊임없는 추구하는 평화와 화해에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를 위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 장관께서는 방한 당시 연설에서 ‘초연결 시대에 고립된 개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초연결 시대 속 개인을 향해 cpbc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조언해 주신다면요. 새로운 시대 속에서 미디어가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은 항상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톨릭 언론인들에게 한 연설에서 좋은 저널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듣기(ascoltare), 더 깊이 탐구하기(approfondire), 말하기(raccontare)입니다. 첫 번째 ‘듣기’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직접 대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기자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인터뷰할 사람들, 이야기의 주인공, 뉴스의 출처를 직접 대면하고 인내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메일·전화·화면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발 밑창이 닳도록’ 사무실에서 나와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의 시대 상황을 확인하는 언론인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더 깊이 탐구하기’입니다. 현 시대는 온라인을 통해 순식간에 수백만 개의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불행하게도 단순화와 대립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서 좋은 저널리즘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며, 이를 ‘심화·분석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영감을 받아 현재 당면한 일에 대한 심층적인 복음과 독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말하기’입니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내세우거나 어떤 사안을 두고 스스로 ‘심판자’처럼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엔 접하는 이야기에 스스로 충격을 받고 때로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겸손하고 솔직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미디어가 현실에 대한 복음적 해석을 제공한다는 것은 구원의 이야기에서 작용하는 선(善)이 승리했음을 의미합니다. 겸손하게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언론의 목적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진실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교계 미디어는 저널리즘 외에도 수행해야 할 또 다른 역할이 있습니다. 이는 ‘가장 깊은 의미의 소통’과 관련 있습니다. 미디어는 친교 수단인 동시에 그 자체로 강력한 소통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문화·예술·영화는 물론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만남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소속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그 경계를 넘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예수님 메시지를 증언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평화와 일치 속에 선의를 가진 모든 이를 하나로 모으는 프로젝트, 세대를 연결하고 세대 간 다리를 구축하는 일도 포함될 것입니다. - cpbc를 포함한 교계 미디어가 인공지능 기술을 선용하고 조화롭게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술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술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맹목적으로 믿어서도 안 됩니다. 알고리즘과 이를 처리하는 기계가 진리와 나눔, 봉사, 지혜의 인식과 양심을 이야기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나요? 그러한 기술들이 각 개인의 고유성을 인식합니까? 아니면 우리를 표준화하고 있나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술만으론 지식과 관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기는 모든 것을 추상적인 계산으로, 사람이 아닌 데이터로, 경험을 사례로 축소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기술에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공익에 대한 봉사의 관점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친교를 쌓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모두 나쁜 것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너머’가 무엇인지 항상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야 우리는 기하급수적인 기술 발전의 도전을 인류의 성장을 위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AI가 ‘바벨탑의 혼란’이 아닌 성령 강림(Pentecoste)의 조화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공지능(AI) 등 빠른 기술 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먼저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도구가 어떻게 개인 간의 관계를 더욱 강하고 진실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더욱 응집력 있게 만드는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기술을 바탕으로 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지, 아니면 모든 인간을 표준화하고 이를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되는지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더 많은 평등을 가져올 수 있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알고리즘과 이를 바탕으로 산출되는 결과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기계가 아닌 인간, 알고리즘 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삶, 우리의 자유, 우리의 자유 의지에 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알고리즘의 차이는 공동선을 향한 긴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공동선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각 개인의 책임이 모든 사람의 운명과 연관돼 있다는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더 이상 계산되지 않는 인색한 산술로 모든 것이 축소되곤 합니다. 오늘날의 알고리즘은 개인의 요구를 집단의 요구와 구분하고, 특정 개인의 관심에 응답하는 관련 항목을 정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결국 규칙을 새롭게 만들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시장과 이익, 마케팅이라는 냉담한 논리에서 해방되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 cpbc를 비롯한 교계 미디어가 모든 세대 인류와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할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역시 ‘대화’를 바탕으로 한 소통으로 이를 실천해야겠지요. 이는 가톨릭 미디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교계 미디어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구축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물론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나아가는 길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은 타인에 대한 문화적 선입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케노시스(자기 비움, Kenosis)’에 기반한 모든 사고는 ‘타자의 신비’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라 경험으로 연결하고 이해하는 일을 통해 심오한 감각의 지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마음이 필요하고, 우리를 하나로 묶는 사랑을 증거하는 관계망이 필요하며, 진정으로 ‘서로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 전쟁과 분열 속에서 ‘평화의 건설자’로서 교회 저널리즘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만, 당연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평화의 건설자로서 저널리즘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나 잘 압니다. 하지만 최근 급진화·단순화로 인해 인내심 없이 즉시 결론에 도달하려고만 하는 언론의 경향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짙어지고 있습니다. 스웨덴 사회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우리는 스스로 적이 되는 역설에 도달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부르며 어디서나 똑같이 ‘똑똑한’ 것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갈퉁에 따르면 언론에 보도되려면 부정적이어야 하고, 전쟁과 폭력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외부 지향적이어야 하고, 구조화되지 않아합니다. 즉 비난할 사람이 있어야 하며, 이 비난은 종종 다른 국가, 특히 중요한 국가의 중요한 이들만을 향한다는 겁니다. 적을 만드는 것이 편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화하려는 큰 유혹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 ‘전쟁 언어’의 사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냉정한 이원론을 통해 축소하거나 희생양을 찾으면서 오히려 끊임없이 허구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부정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구축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거나, 다른 사람을 부정하는 것 사이의 그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는 간단하고 단순한 답변을 듣기를 원합니다. 답은 하나뿐이고 대안은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것이죠. 하지만 모든 것을 아군-적군이라는 메커니즘으로 바라본다면 대화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평화의 구축자로서 저널리즘은 논쟁의 거짓된 필요성을 멀리하고, 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타인을 부정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딜레마가 얼마나 거짓인지 밝혀야 합니다. 평화와 정의·선함·아름다움·형제애의 가치를 앞장서서 전해야 합니다. 낯선 이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뉴스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평화 구축자로서 저널리즘은 전쟁 보도를 피해야 합니까? 악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진짜 문제는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우리는 그저 천사 같은 세계만 전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구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 저널리즘의 이름으로 전쟁을 취재하지 않고,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순 없습니다. 나쁜 이야기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조작하는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을 드러내지 않고 그 거짓을 활용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것은 악에 굴복하고 선의 역동성을 표출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깨지기 쉬운 공존의 실을 닳게 하고 깨뜨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이 구원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저서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산 자의 지옥은 실제로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이미 여기에 있는 것,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지옥, 우리가 함께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의 고통을 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지옥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렵고 지속적인 관심과 학습이 필요합니다. 지옥 한가운데서 누가,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 인식하는 방법을 찾고 알아가며 지옥을 지속시키고, 지옥 속에서 공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cpbc도 그 공간을 주는 제공자이자 평화 저널리즘의 공간입니다. 우리는 결코 ‘탈맥락화’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단순화하려는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희생양 패러다임에 안주해선 안 되며, 순간에 집착하기보다 사안을 충실히 살피고 성찰해야 합니다. 올해는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가 반포된 지 6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회칙은 여전히 이 시대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군비 균형에 기초한 평화의 기준은 진정한 평화는 상호 신뢰를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다는 원칙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지상의 평화」 61항) 우리는 평화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물론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우리 활동의 중요성, 즉 평화의 정신을 우리 양심에 고취시키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확실히 다릅니다. 그러나 가톨릭 언론인에게 맡겨진 임무는 평화를 위한 교황의 호소를 지루한 일상으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들이 사랑하는 수백만 명의 마음과 함께 뛰는 가슴으로 보도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평화는 언제나 가능합니다. 현재를 넘어서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비록 많은 사람이 평화를 포기하더라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 cpbc가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 보편 교회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통합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계별로 함께 구축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명입니다. 친교와 결합돼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서로의 지체가 됩니다. 한때 누락된 것이 정보였다면, 오늘날 누락된 것은 관계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사실이 아닌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의사소통 수단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과제는 선과 아름다움·진실에 가까이 조직하고, 네트워킹하고,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관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사명이 있습니다. 웹·텔레비전·인터넷·라디오·인쇄 매체 사이의 구별을 극복하는 친교의 여정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 내 의사소통은 이러한 참여와 나눔의 원칙으로만 특징지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네트워크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친교의 진리, 그리고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식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cpbc 구성원에게 전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다면? ‘cpbc’가 언제나 건설의 도구가 되고, 화해 과정의 촉진자가 되며, 만남의 문화를 촉발하는 가교가 되길 바랍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시대의 징표를 이해하고, 남들이 버리는 것을 온라인에 게재하고,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늘 질문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임무이자, 역할입니다. 여러분과 대화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마음으로부터 함께 걷고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응답을 위해 진심으로 답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여러분의 속담처럼 인터뷰를 통해 나름대로 올바르게른 표현하고자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준비하는 이 시기에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올로 루피니 장관= 1956년 이탈리아 팔레르모 출생. 로마 라 사피엔자대학 법학 전공 후 1979년부터 신문사 기자생활 시작, ‘일 마티노 디 나폴리 신문’ 등 신문사 3곳을 거쳐 ‘라이 라디오 뉴스’, ‘국회 GR 채널’ 등 여러 언론사에서 근무했다. 2014년부터 이탈리아 주교회의가 운영하는 ‘TV2000’ 국장을 지내다가 2018년 7월 교황청 홍보부(Dicastery for Communication) 장관에 임명됐다. 교황청 홍보부는 교회 복음화 사명에 봉사하기 위해 교황청 사도좌의 커뮤니케이션 기구를 활용해 전 세계 지역 교회와 소통하며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복음 전파에 힘쓰는 부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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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5-08 오전 10:32:05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