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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2024-05-02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가톨릭신문 2024-05-02 오후 3:12:01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