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News

  • 전례성사
  • 가톨릭성미술
  • 가톨릭성인
  • 성당/성지
  • 일반갤러리
  • gallery1898

알림

0

  • 가톨릭뉴스
  • 전체 2건

육신 취하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신 보이는 하느님 그린다 2024-05-02
 
(작품1)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 (759-826) 성인, 수도원장, 신학자, 콘스탄티노플 출생.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수도원을 개혁했다.



이콘은 존재하는 것의 형상이지만
우상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의 형상

인간 구원 위해 피와 살을 취하신
볼 수 있는 하느님을 그리는 게 이콘



1. 이콘성화와 우상은 어떻게 다른가?
8, 9세기에 걸쳐 비잔티움 세계에서 일어난 이콘 파괴 논쟁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표현으로 하느님의 신성을 표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갈등이었습니다. 또 동로마 황제는 그 외에 대외적인 모든 갈등의 원인이 이콘 숭배가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물질로 만든 우상에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콘은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이슬람교의 화합에 큰 장애물이라 여겼습니다. 이콘 탄압과 형벌은 729년 동로마 황제 레온 3세에 의해 시작됐고, 이콘을 제작하는 수도원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교도적인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 논리는 그리스도론에 관계된 정체성(正體性)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759~826)는 이콘은 존재하는 것의 형상이지만, 우상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의 형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작품 1)

우상은 어느 물체들, 예를 들면 해·달·별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각각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고 신으로 섬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을 황금소의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은 이교도들의 신 바알 형상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대체해 놓고 그 앞에서 주술이나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조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는 물질과 영, 즉 세상과 하느님 사이가 이콘을 통해 상징적으로 매개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콘의 이미지와 원형 사이에는 엄연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콘은 원형이 아니고 원형의 반영(反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개념에 실재(實在)하더라도 시각화할 수 없는 것은 이콘화(化)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이콘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콘에서 표현하는 것은 실재적이고 역사에 존재했던 분을 기본으로 합니다.

성화상 반대론자의 입장 : 성화상이 하느님을 상기하거나 연상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콘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그들은 신성은 표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상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나 네스토리우스의 사상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았습니다.

옹호론자의 입장 :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시어, 이제는 하느님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성화상의 공경은 물질 숭배가 아니며, 이것을 통해 물질의 창조자이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콘은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육신에 바탕을 두지만,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 중 하나만을 그린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분은 분리할 수 없는 인성과 신성을 그분 안에 모두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451년 칼케돈 공의회 결의)

이콘 반대론자들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변화시킨다(神化)’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형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형상은 그 원형과 성질과 본질도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체성사는 물질이 함께하는 성사이니만큼 이콘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를 ‘형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는 형상이 아니라 원형으로,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콘은 원형과 같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같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실재 인물과 이콘에 그려진 인물은 별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실제 모습과 무엇이 닮았는지 찾을 필요가 생깁니다. 다음의 예를 들어봅니다.

 
(작품 2) 다마스쿠스의 성 요하네스(675-749), 프레스코. 그의 저서는 이콘을 수호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반대파에 의해 오른손을 절단당했는데, 성모님께 기도하고 손이 다시 붙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세 손의 성모 이콘이 등장한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엇을 그리는가?

유치원에서는 아동들에게 그림 그리는 시간을 많이 주어 새로운 시각과 개념을 알려주고, 서로의 유대관계를 형성시키는 교육을 합니다.

어느 날 하늘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오늘은 모두 자기 아빠를 그리세요!” 하자 신이 나서 열심히 아빠를 그렸습니다. 늦둥이 하늘이의 아빠는 정수리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있는 대머리에 갈색 테의 안경을 쓴 회사원이었습니다. 갈색 양복을 입고 노란 넥타이를 매고 까만 구두를 신었습니다. 하늘이는 대머리에 안경을 쓴 아빠를 어떻게 그릴까요?

하늘이는 도화지에 넓적한 얼굴을 그리고 그 위에 두 눈과 귀, 코와 웃는 입을 그렸습니다. 그 다음 머리카락 세 개와 갈색 안경을 그리고, 허수아비같이 양팔을 활짝 벌린 뒤 갈색 양복에 노란 넥타이와 긴 바지에 검정 구두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위쪽 종이 여백에 ‘하늘이 아빠’라 썼습니다.

다른 유치원생들의 아빠와 구별되는 각자만의 고유성 때문에 이 그림은 분명히 하늘이 아빠를 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늘이 아빠는 “나와 똑같네! 우리 아들, 참 잘 그렸네!”하고 칭찬할 것입니다. 하늘이는 정말 잘 그렸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이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서 ‘원형과 공유한 관계성(유사함)’이란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리는 이콘은 하느님의 눈에는 유치원생이 그린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가 말하기를 자연적인 면만 판단한다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이콘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닮은 모습만을 중요시한다면 애초부터 원형과 다르기에 서로 닮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현에서 ‘공유된 관계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콘은 그분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원형과 어떠한 관계(유사함)가 있느냐를 중요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하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작품 2) ‘과거에는 육신이 없던 하느님을 결코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육신을 취하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신 보이는 하느님을 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갖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아닌, 우리 구원을 위해 피와 살을 취하신 볼 수 있는 하느님을 그리는 것입니다.’ 또 이콘에 쓰이는 해당 실존 인물의 이름을 통해 그림을 보는 신앙인들에게 더욱 구체성이 제공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성 표현의 한계성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관계성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기서 관계성으로는 ‘그리스도의 명칭과 그리스도와 관련된 상징을 연결해 만든 그리스도의 상’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상징인 후광에 ‘있는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약자, 후광에 어울리는 수(數)의 비례에 따른 둥근 형태의 두상,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물결치는 머릿결, 평행으로 휘어지는 적당한 간격의 옷 주름 등으로 그리스도를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거룩한 분을 의미하는 색깔의 옷, 말씀을 의미하는 성경,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얼굴(즉 큰 눈, 좁은 코, 작은 입)도 같은 이유입니다.

가구·발판·성경이 역원근법(逆遠近法)으로 구성되어 실제 형태와 다르게 표현됩니다. 그 외에 그림자를 생략하는 기법을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상단에 붉은색으로 씀으로써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만든 그리스도의 상(像)입니다.
---------------------------------------------------------------------------------------
* 큰 눈 : 하느님의 눈을 대신함.

* 좁은 코 : 하느님의 영이 들어온 곳. 따라서 하느님의 향기만을 취함.

* 작은 입 : 물욕이 없다는 뜻.
 

김형부 마오로
[가톨릭평화신문 2024-05-02 오전 10:32:0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