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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1)] 성 유대철과 복자 이봉금 | 2024-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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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시성 40주년이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의 시복 1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여 5월부터 한국 순교자 성월인 9월까지 격주로 성인과 복자를 연계한 연재물을 시작한다. 성인과 복자를 조명하며 신앙 선조들의 선물에 다시금 감사하고 믿음을 굳건히 하는 계기를 마련해 본다. 소년소녀, 어른을 계도하다 (배교한 회장에게) “저와 같은 어린 사람에게 갖가지 고통을 굳세게 참아 내라고 권면해야 하실 텐데, 주객이 전도되었으니 이것이 웬일입니까? 빨리 회개하여 예수를 위해 죽으십시오.” 성 유대철(베드로, 1826~1839)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 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복자 이봉금(아나스타시아, 1827?~1839) 1839년 기해박해로 교수형을 받아 스러진 소년 성인과 소녀 복자 유대철과 이봉금. 사형 당시 그들의 나이는 겨우 13세와 12세(추정)였다. 성인과 복자는 각각 우포도청과 전주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성 유대철은 감옥에서 사도의 직분을 행해 배교한 회장을 직접 타이르거나 배교한 자를 회개케 하기도 했다. 복자 이봉금 또한 어머니의 옥중에서 인간적으로 의지할 데 없을 때도 어른스럽게 순교를 결심해 많은 이들을 감복게 했다. 남다르게 키워 낸 신앙 성 유대철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외교를 고집한 어머니에게도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박해가 시작되자 마음속에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이 생겼다. 성 유대철이 옥에 갇히자 옥사장들은 ‘배교한다’는 말을 한마디만이라도 하게 하려고 갖은 혹형을 가했다. 하루는 포졸이 구리로 된 담배통으로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성인은 “그러믄요. 이것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포졸은 벌건 숯덩이를 집어 들어 입을 벌리라고 했다. 성 유대철은 “자요” 하고 입을 크게 벌리자 포졸들은 놀라 물러나고 말았다.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유대철을 데려와 다른 죄수들이 정신이 들게 하느라고 허둥지둥할 때 정신이 든 성인의 첫마디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시오.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거예요”였다. 이 말에 포졸들도 놀라워했다. 또 언제는 자기 몸에서 헤어져 매달려 있는 살점을 떼어서 재판관들 앞에 던지며 웃자 관원들은 모두 치를 떨었다. 복자 이봉금은 정해박해를 피해 피신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기해박해 때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 중이던 복자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 집으로 이주했다. 복자 이봉금은 열 살 무렵 교리문답과 아침·저녁 기도를 배운 뒤, 집을 방문한 프랑스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소녀의 마음에 감동한 신부는 첫영성체를 허락했다. 하지만 이내 신자들과 체포돼 전주로 압송됐다. 포졸과 옥리들은 복자의 나이가 어린 데다 얌전했으므로 동정심이 들었고 배교해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했으나, 복자 이봉금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복자를 여러 차례 관장 앞으로 끌어내 위협을 했지만,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자 끝내 고문을 가했다. 거룩한 부모를 닮아간 자녀 열절한 신앙을 지닌 그들에게는 성인·복자 부모가 있었다. 성 유대철의 아버지는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 1791~1839), 복자 이봉금의 어머니는 복자 김조이(아나스타시아, 1789~1839)이다. 성 유진길은 신부만큼 거룩한 생활을 하며 저명한 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고 아들 성 유대철의 입교를 이끌었다. 유대철은 아버지 유진길이 옥에 갇히자 1839년 8월 자수해 아버지를 뒤따랐다. 복자 김조이는 남편 이성삼(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해 성가정을 이뤘으며, 박해 때 문초를 받고 돌아온 딸에게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라고 훈계하며 딸의 신앙을 굳건히 했다. 오늘날 학업이나 휴식 때문에 미사나 주일학교 등 자녀의 신앙생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소홀히 하는 부모 역할에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다. ◆ 복자 이봉금의 순교 얼 서린 전주 옥터 복자 이봉금이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한 전주 옥터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현무2길 59-25 한국전통문화전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전주성 내에 가장 큰 옥이 있던 장소로 2014년 9월 3일 성지로 축복됐다. 조선 시대 전주는 전라도의 중심지로 각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전주 옥에 갇혀 고문 당하고 순교했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복자 유중철(요한, 1779~1801)과 그의 동생 복자 유문석(요한, 1784~1801)이 교살됐다. 정해박해(1827년) 때는 240여 명의 신자들이 감금돼 고초를 겪었다. 복자 이순이(루갈다, 1782~1802)의 동생 복자 이경언(바오로, 1792~1827)도 이때 순교했다. 기해박해(1839년) 때는 복자 김조이(아나스타시아, 1789-1839)와 복자 심조이(바르바라가, 1813~1839)가 옥중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사했다. 특히 복자 김조이는 그녀의 어린 딸 복자 이봉금이 바라보는 가운데 순교했다. 옥은 고통스러운 곳이기도 했지만 신자들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곳이기도 했다. 기해박해 때 전주 숲정이 성지에서 순교한 복자 이일언(욥, 1767~1839), 복자 신태보(베드로, 1769?~1839), 복자 이태권(베드로, 1782~1839), 복자 김대권(베드로, ?~1839), 복자 정태봉(바오로, 1796~1839)은 정해박해 때 이곳에 12년 동안 갇혀 있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 소리로 기도했다.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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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4-30 오후 2:12:16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