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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카인의 후예(하) | 2024-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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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에서 농경문화를 이룬 종족은 부와 풍요를 구가했던 데 비해 유목민들은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축들 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소박한 유랑 생활로 만족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카인은 아벨보다 훨씬 더 유복하고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더 값진 자기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벨이 바친 보잘것없는 어린 양을 굽어보시자 카인은 몹시 화를 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신 하느님께 있다. 아벨은 아무 잘못도 없다. 아벨은 카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힌 적도 없고, 열악한 환경에서 가축이나 따라다니면서 박복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아우를 카인은 애틋이 여겨 감싸고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였으니 카인 안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몹시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린 카인의 자세 안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공감도 동의도 할 수 없는 부정적 태도의 표출이다. 세상에서는 더 부유하고 더 힘이 있는 자가 더 높은 자리와 앞자리에 앉고, 약하고 가난한 자는 아랫자리에 앉고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관행이다. 카인은 하느님이 그런 세상의 상식에 따르지 않으시고 약자를 높고 좋은 자리에 앉히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화를 냈다.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것은 하느님을 마주 보기도 싫어서 얼굴을 돌렸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거부요 저항의 자세다. 하느님은 카인의 이런 태도를 보시고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그를 노리게 될 것이라 하신다. 카인 안에 하느님과는 공존하거나 어우러질 수 없는 죄악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양새다. 이 용암이 폭발하여 친아우인 아벨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살인에까지 이르는 포악은 카인 안에서 나왔다. 그리고 카인이 취한 하느님에 대한 거부의 자세는 이미 아담과 하와 안에 사탄이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안에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포악의 뜨거운 에너지가 끓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불의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저지른 불의와 폭력의 화염은 우리 안에 옮겨붙으면서 새로운 포악의 에너지를 증산한다. 전쟁에 나간 병사가 처음에는 적이라 해도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이 쏜 총알로 내 옆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노의 에너지가 활활 타올라 응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번만 방아쇠를 당기면 그다음부터는 거리낌 없이 적에게 보복의 총알을 무제한 난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공통된 체험이다. 상대 포악의 에너지가 자신에게 전염되고 확대되어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사슬이다. 인류는 과연 이 포악의 에너지와 폭력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온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 자신 안에 그럴만한 역량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주신 것 같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로데 왕은 무자비한 비인간적 폭력으로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몰살시키는 참극을 저질렀다.
그때 하느님이 보여주신 대처법은 도망치는 일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이집트로 몸을 숨겼다. 헤로데 왕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하느님 몫이었다. 죄악의 우두머리와 싸우는 일은 하느님이 감당하셨다. 하느님은 시간으로 헤로데 왕을 심판하시고, 아기와 부모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안배하셨다. 루카 복음 22장 36절에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음모가 절정에 달하자,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정당방위를 인정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무리에게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 오른쪽 귀를 잘라버리자, 예수님은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마태오복음 26장에는 같은 장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박해자들의 음모와 폭력에 힘으로 맞서는 길을 포기하셨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악의 우두머리와의 싸움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드리셨다. 이것이 우리 안에 포악과 폭력의 불씨를 심어놓은 악의 괴수에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고 지혜다. 카인의 후예인 우리가 그 포악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길이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 전 제주교구장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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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4-30 오후 1:12:14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