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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넘치는 사제단·교구민과 함께한 시간…행복했습니다” | 2024-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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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이던 1951년 1·4후퇴 당시 네 살의 이기헌(베드로) 주교는 수많은 피난민 행렬 속 부모 손을 꼭 잡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 주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를 북한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고 이후의 사목 방향에도 영향을 줬다고 전한다. 그렇게 남한에 온 지 오랜 시간이 흘러 북한과 마주한 의정부교구 교구장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직무를 마무리하게 됐다. 약자를 보듬고 교구의 일치와 친교를 추구하며 민족화해를 위해 힘써 온 이기헌 주교에게서 사목 여정의 소회를 들었다. 성당 건축의 기억, 그리고 군종교구 이 주교는 사제품을 받은 후 1995년 서울대교구 교육국장(현 청소년국장)을 맡기 전까지 군종신부 시절을 포함해 본당 사목자로서 경험을 착실히 쌓았다. 모든 순간이 소중했지만, 그중에서도 잠원동본당 주임 신부 때 성당 건축을 특별하게 기억했다.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신자 각자의 성당을 짓는다는 마음이었다”는 이 주교는 “성당 건립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염원하던 그때를 나와 잠원동본당 모든 식구가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군종교구장으로 활동한 이 주교는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눈부시게’ 돌아다녔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또 “전방과 후방의 군인 청년들은 물론 이라크·동티모르 등 해외까지, 군종교구는 황량한 벌판을 뛰어다니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같다”면서 “교회에 청년은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뛰어다녔다”고 전했다. 젊음 가득했던 의정부교구, 소통으로 완성하다 이 주교는 의정부교구장으로 착좌한 2010년 당시의 교구를 젊고 활력 넘치는 곳으로 기억했다. 이 주교는 “당시 사제들의 평균 연령이 36세 정도였는데, 교구 사제단 전체가 열정에 불타올랐다”면서 “교구가 아직은 힘들던 시기라 교구청은 없고 사제관도 부족해 단체 숙식을 해야 할 정도였지만, 그 와중에도 교구 발전에 대한 열정만큼은 다른 교구가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의정부교구에 왔을 때 사제들이 이한택(요셉) 주교님을 목말 태우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교구가 사제들 열정 때문에 모두 불타버리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제단과의 일치를 가장 중요시했다. 이 주교는 “사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사제라는 마음으로 한 명 한 명 모두 만나 소통하고 격려하며 사목 일선에서 겪는 고충과 현장감 있는 의견을 경청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지구별 사제 모임을 장려해 친교를 다지고 교구 운영에 대한 각자의 생각도 공유할 수 있게 했다. 지금은 당시의 젊었던 사제들도 50대에 접어들어 중견 사제가 됐다. 이 주교는 “당시의 사제들이 열정은 그대로 간직한 채 신앙적으로도 성숙하고 노하우와 전문성도 갖춘 사목자가 된 것 같아 기쁘다”며 “지금 젊은 사제들도 잘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구민들도 열정에 뒤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주교는 “교구민들이 순박하고 마찬가지로 교구를 함께 성장시키겠다는 열정 속에 사제들을 많이 지지해 주고 따랐다”고 말했다. 이주민·난민, 그리고 간절했던 민족화해 이한택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있던 때부터, 의정부교구는 지역적 특성을 살려 민족화해와 이주민사목에 열심이었다. 이 주교는 자신도 이주민이라고 말했다. “평양 출신으로 6·25 전쟁 때 남으로 넘어왔으니 나도 이주민”이라며 “그러다 보니 특히 이주민·난민 사목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노력했다”고 이 주교는 말했다. 교구 내 이주민·난민들의 생활은 생각보다도 더 열악했다. 이 주교는 “난방비가 부담이 크다 보니 한겨울에 집에서도 두꺼운 옷을 껴입고 덜덜 떨거나 거주시설이 부족해 여러 가족이 좁은 집에 모여 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그의 관심 아래 의정부교구는 ‘1본당 1난민가정 돌봄사업’을 시행하는 등 이주사목에 힘썼다. 이 주교는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며 남북평화와 민족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많은 이가 현 상황이 익숙해 인식하지 못하지만, 한반도 분열과 갈등상태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며 “민족의 화합과 일치는 곧 국가의 힘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와 교구 공동체 모두가 한마음으로 남북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국가가 관심이 없으니 안타까웠다”며 “정치인들이 민족화해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구 사제단은 물론 교구민들도 남북평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쏟고 있기에 저는 여전히 민족화해라는 꿈에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는 내내 교구에 대한 애정이 넘치던 이 주교였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는 “교회적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은 교구의 장점”이라면서도 “다만 코로나19 이후로 더욱 영성과 기도가 조금 소홀해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특히 “신자들이 성체조배와 성경 읽기로 신앙을 체험하고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행복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은퇴 후 “아코디언과 중국어 배우고 싶어” 바쁘게 걸어온 이 주교도 이제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에게 앞으로 소소한 계획에 관해 물었다. 이 주교는 “은퇴 후 그간 밀린 독서를 자주 하고 싶고, 중국어와 아코디언도 배울 예정”이라며 “중국어는 본당 사목 시절에도 배웠는데 이번엔 중국어를 잘하는 신부님에게 ‘과외’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코디언에 대해선 “다 같이 어울릴 때 모두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악기라고 생각해 아코디언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마치 그의 사목 표어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불러라’(시편 149장)를 떠올리게 했다. 또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소통하고 사제단과 신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그의 품성다운 계획이었다. “아코디언을 아주 잘하는 북한이탈주민 선생님이 계셔서 그분에게 아코디언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해 모두를 흥겹게 만들고 싶습니다. 누군가 소소한 계획을 물어보면 저는 아코디언을 배우고 싶다고 꼭 말합니다.” 이형준 기자 june@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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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4-30 오전 11:52:12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