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한다. ‘좋아한다’의 동의어는 ‘가까이 다가간다’이다. 그래서 홀로 산에 자주 다가갔다. 외롭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와 동행한 것은 계곡이었다. 계곡을 옆구리에 나란히 하고 함께 오르는 산행은 그때마다 행복이었고, 그 행복 하나하나가 모여 추억이 됐다. 설악산 계곡은 웅숭깊었다. 지리산 계곡에서 퀄퀄거리며 쏟아지던 물의 잔상은 아직도 강렬하다. 가뭄이 한창인데도 시원한 생명력을 선물했던 치악산 계곡의 곡절(曲折)도 잊지 못한다.
그 ‘계곡의 추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성경을 읽던 어느 날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이 맞짱 싸움을 벌인 곳이 ‘엘라의 계곡’이다.
“엘라의 계곡을 사이에 두고 골리앗과 다윗은 맞서고 있었다.”(1사무 17,3 참조)
‘엘라’는 ‘상수리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는 강원도에서 성장했지만, 상수리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아직’ 모른다. 어쨌든, 베들레헴 서남쪽 약 24km 지점에 있는 이 상수리나무 무성한 계곡에서, 약자 다윗이 강자 골리앗을 죽이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엘라의 계곡은 기적의 계곡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이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은 약자가 승리한다는 역설을 믿는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시편 118,22)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엘라의 계곡 전쟁터 한가운데로 내몰릴 때가 많다. 그 전쟁터가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숨는다.(창세 3,10 참조)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삶 안에서 사랑을 회복해 낸다면, 사랑으로 두려움을 극복해 낸다면 우리도 골리앗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두려워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지 말자. 지금까지 신고 있던 피해의식과 옹고집의 신발을 벗어 던지자. 사랑이라는 이름의 새 신발 끈을 꽉 매자.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자. 믿음의 방패를 잡자.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자.(1테살 5,8; 에페 6,14-17 참조) 무장을 마쳤으면, 엘라의 계곡 한가운데로 뛰어들자. 삶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는 다윗의 전투, 엘라의 계곡 전투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오는 5월에 월출산에 가려 한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예쁜 계곡이 불쑥 나타나 나의 옆구리에 붙어 동행할 것이다. 행복할 것 같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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