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으며 말씀이 지닌 매력을 느낄 때는, 결국 그 말씀의 힘을 체험할 때이다. 이 말씀의 힘은 하느님 자체에서부터 흘러나오며,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당신의 뜻을 실현시키신다. 이는 창세기 처음부터 굳건하게 선포되고 있는 진리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고 명하시자, 그 즉시 빛이 생겨난다. 이렇게 힘있게 그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현을 이루기에, 성경 안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하느님 말씀의 실현을 시적인 표현을 통해 아름답게 그려주고 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 5,10-11 참조)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했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선포했던 내용의 골자는 하느님의 말씀은 한마디의 소실됨 없이 모두 실현을 이룬다는 점이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1사무 3,19)
그러나 거침이 없을 것 같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 뜻의 실현은 때때로 난관에 직면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느님 말씀은 바로 인간이라는 어려움을 만난다. 이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진면목이기도 한다. 하느님의 뜻은 굳건했지만, 그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인간은 한없이 부족했다. 이는 아브라함이 사라이를 향해 누이라고 부르며 그녀를 이집트인들에게 내어주는 모습 안에서 잘 드러난다.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시오.” 아브람이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이집트인들이 보니 과연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다. 파라오의 대신들이 사라이를 보고 파라오 앞에서 그 여자를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파라오의 궁전으로 불려 갔다.(창세 12,13-15)
아브라함이 사라이를 이집트인들에게 내어주었던 행동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던 하느님의 뜻에 직접적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하느님 뜻의 실현은 그 누구도 아닌 아브라함 자신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달리 말해, 하느님에게 선택되어 그분 약속의 전달자였던 그 당사자가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데에 첫 장애물이 된 셈이다.
(Jan Provost - Abraham, Sarah, and the Angel)
하느님 약속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던 이는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었다.
얼마나 역설적인 신앙의 장면인가. 주님을 따르고 그 뜻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던 자 스스로 그 실현의 가장 첫 번째 장애물이 된 셈이다. 우리는 사실 이러한 모습을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수없이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본당의 사목을 정성스레 이끌어온다고 했지만, 정작 그 사목을 망가뜨린 중심 인물은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진실한 우정을 위하여 정의와 사랑을 운운했지만, 그 형제적 관계를 망쳐 놓았던 사람은 너가 아니라 내가 아니었던가?
중요한 점은 거침이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거친 삶을 만나고 거친 나를 만나, 잠시 숨을 고르며 우리의 결함을 마주해 주신다는 점이다.
혹시, 나 자신의 부족함에 괴로워하고 있는가? 나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 놓은 것 같다는 자괴감이 들고 있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어쩌면 지금 그 순간은 하느님께서 잠시 몸을 굽혀 나를 마주하고 계시는 소중한 시간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던가.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예루살렘 프란치스칸 성서대학에서 성서 고고학 디플롬(diploma superiore)을 이수했다. 춘천교구 묵호, 퇴계 본당 주임을 지냈으며, 현재 교구장 비서 및 교구 성경 사목 담당 소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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