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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 마무리하며 「척사윤음」 반포, 지도자 잃은 교회 침체에 빠져 | 2024-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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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10월 18일 「기해척사윤음」 반포 세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의 짧은 사목활동은 1839년 박해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기해박해의 정치적 원인을 풍양 조씨 일파가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한 데에서 찾고 있다.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세도가인 김유근(金?根)이 역관이었던 유진길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천주교를 용인하고 있었다. 김유근이 중병으로 은퇴하면서 세도권이 풍양 조씨에게 넘어갔고,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천주교에 미온적 입장을 지닌 순원왕후 일파 안동 김씨 세도가를 압박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지연은 천주교인을 무부무군(無父無君, 아비도 임금도 없음)의 이적(夷狄, 오랑캐)·금수(禽獸, 짐승)만도 못한 이들로 몰아붙였고, 대표 신자들을 체포·처형하면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해 박해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여기서는 「기해척사윤음」을 간단히 정리해보면서 당시 정부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유교 벗어나는 모든 것은 이단이고 오랑캐 “왕께서 말씀하셨다. 아, 「중용」에 이르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고 하였고, 「상서」에 이르기를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하민(下民)들에게 본성을 내려주어 그것을 따라서 떳떳한 본성을 소유하였다’고 하였다. ?하늘을 받들고 상제를 섬기는 것이 어찌 사단(四端)과 오륜(五倫)에서 벗어나겠는가! ?이승훈이라는 자가 서양의 책을 사 가지고 와서 천주학(天主學)이라고 일컫고는 선왕의 법언이 아닌데도 몰래 서로 속여 꾀어내고, 성인의 정도(正道)가 아닌데도 탐혹하게 만들어 점차 이적·금수의 지역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신유년 사학을 토죄한 옥사(獄事)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던 것이다.” 윤음은 그 시작에서부터 조선은 유교 문명을 수호하는 국가요, 이를 벗어나는 것은 모두 이단이고 오랑캐로 간주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승훈에서 시작된 천주학은 정도(正道)가 아니어서, 신유년(1801)에 큰 옥사(獄事)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유교적 이념에 따라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서 천주학의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분석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첫째, 천주학(天主學)을 한다는 자들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씻고 은총을 구하는 천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하늘을 속이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데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耶蘇)라는 존재는 고금을 통해서 있을 수 없는 거짓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도 귀신도 아니며, 하늘과 사람이 섞일 수도 없는데, 하늘이 내려와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다. 셋째, 승냥이와 수달도 제사를 지내는데 저들은 신주(神主)를 부수고 제사를 폐지하고 있으니, 천주교인들은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이들로 규정하였다. 넷째, 천주교인은 군신의 의리를 부정한다고 보았다. 교황(敎皇)·교주(敎主) 등의 호칭을 만들어서 군주의 권력을 훔쳐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음양설에 따라서 반드시 부부(夫婦)가 있는 것인데, 저들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고 정덕(貞德)을 칭탁하면서 실제로는 남녀가 섞여 풍교(風敎)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침내 인류를 멸망케 하고, 인륜을 더럽힌다고 보았다. 여섯째, 성모(聖母)·신부(神父)·영세(領洗)·견진(堅振) 등은 마치 무당이 부적이나 주술로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과 비슷하고, 불교의 주장인 천당지옥설을 똑같이 주장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끝으로, 예수(耶?)는 참혹하게 죽은 자인데, 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망령된 자일 뿐이다. 이를 따르는 이들은 마치 황건적이나 백련교도와 같은 자가 되는 것이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전하고 있다. 한문본과 더불어 언해본 윤음 전국 배포 「기해척사윤음」은 유교적 양반 관료 사회였던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아직 그 실체조차 모르는 서양의 천주교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다. 천주교 입장에서는 이미 이 세상이 천주(天主)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우리 사람의 목숨도 결국은 천주의 숨결에 의해 주어졌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유교와는 그 세계관이 달랐다. 그래서 기해박해 때 순교했던 정하상(바오로)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조정에 올리면서 “먼저 그 의의와 이치가 어떤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나 어이없고 원통스러운 말로 무조건 거룩한 교회를 옳지 못한 가르침이라고만 몰아세우고는 사형법으로 처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천주교의 기원과 전통을 조사해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며 안타까워하면서 서문을 쓴 바 있다. 「기해척사윤음」은 1839년 10월 18일(음) 조인영(趙寅永, 1782~1850)에 의해 총 2226자 분량의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이 윤음은 한문본과 더불어 언해(諺解, 한글로 풀이함) 작업이 이뤄져서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諭中外大小民人等斥邪綸音)」이라는 제목으로 합본돼 책자로도 배포되었다. 당시 천주교가 상층(양반 지도층) 외에도 하류 평민과 부녀자에까지 널리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하층에게 고루 읽힐 수 있도록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척사윤음」으로 1839년 박해는 어느 정도 막을 내리게 되는데, 마지막 천주교도들의 사형집행장을 당고개로 지정하면서, 10여 명의 당고개 순교자가 추가되었다. 지도자급 신자 모두 순교 기해박해는 체포된 신자 수는 적다고 할 수 있지만, 전국적인 규모로 자행되었다. 특히 이 박해로 말미암아 세 명의 선교사 외에 지도자급 평신도들이 모두 순교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한동안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앵베르 주교로부터 시작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기해일기」라는 이름으로 계속 보완되었다. 후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82위의 기록을 모아 마카오 본부로 보냈는데, 이를 받은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라틴어로 옮겨 교황청에 보냈다. 그리하여 이들은 1857년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이후 1925년 7월 5일에 기해박해 순교자 70위·병오박해 순교자 9위를 합쳐 79위 복자가 되었다. 1839년을 전후로 한 순교 복자는 선교사가 3명·남자가 24명·여자 43명 등 모두 70명으로 여성이 더 많았다. 이들은 1984년 5월 6일에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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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4-24 오전 11:52:11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