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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자비를 느끼자 2024-04-24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난 다툼 중, 가장 큰 다툼은 아마도 원수 사랑의 계명을 듣고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솔직히 예수님의 이 계명은 불가능해 보인다.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신앙을 선택했는데, 신앙은 왜 나에게 걸림돌로 다가오는가?

그렇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당한 만큼 똑같이 갚아주는 것이 더 정의로워 보인다. 아예 피하거나, 관계를 단절하는 방법도 있다. 예수님이 만약 그렇게 답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과연 그것이 나의 마음을 진정 자유롭게 할까?

예수님의 계명을 ‘존재의 변화’로 접근하면 어떨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 이유는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 아버지처럼 변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살아가는 이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마음의 안식을 얻는 길, 그것은 예수님처럼 온화하고 겸손하게 변화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은 예수님을 뒤따라 걷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으며 제자로 사는 삶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자비를 입은 사람인지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그분이 가신 길은 한마디로 ‘사랑으로 하나 됨’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존재가 되셨다. 인간의 모든 것, 나약함과 한계까지도 끌어안으셨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난다.

성경의 현실주의에 따라 부정적인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모호함·불확실함·불완전함은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라 자비가 실현되는 곳, 구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보며, 너그러운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용서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번민하고 분노와 원한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자신을 자비로운 아버지의 눈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나약한 존재이니까.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그렇게 나약함을 인정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해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나기에.(2코린 12,9 참조) 그러한 포기 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어느 순간 그 모든 아픔이 아무렇지도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가장 큰 원수는 타인이 아니라 그가 한 말과 행위로 인해 얽매이고 고통받는 나 자신이 아닐까.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원수가 아닌, 원수가 내 안에 남겨놓은 것들일 것이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할 때 거리를 둘 수 있고, 연민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고, 자유로움을 경험하고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아버지의 자비로움을 닮아가는 것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 원수가 된 사람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의 경지를 경험할 때 우리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서 벗어나 성장의 길을 걸을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처럼 조금씩 변화할 것이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4-04-24 오전 8:32:1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