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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고통에 중립은 없다” 2024-04-19

4월 16일이 다가오면서 지난 10년의 기억을 자꾸 더듬게 된다. 언론사 기자들도 지난 10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어떤 게 있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4월 16일에 대해서 대부분 또렷한 기억을 갖고 있다.



국가는 믿음을 배신했다


그날 아침에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을 태운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가 남영동 대공분실 안내가 있어서 나왔는데, 답사 전에 미리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전원구조’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조선강국인데 그래야지” 그러면서 안도했다. 나도 그랬다. 저 큰 배가 침몰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구해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남영동 대공분실 안내를 마쳤다. 그리고 휴대전화 전원을 켜고 뉴스를 봤는데, 그게 오보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가슴 졸이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국가는 믿음을 배신했다.


수많은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하늘은 흐렸는데, 도로변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사진에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지만, 아마도 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렸을 거다. 그런 길을 상복 입은 엄마들이 아이들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걸어가고 있다. 행진대오 맨 앞줄 엄마들의 머리는 반질반질했다. 그 전날 광화문광장에서 삭발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애들을 진도 앞바다에 그대로 수장시키는 모습을 부모들이 보게 하더니, 이젠 이 부모들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 국민이 진실을 밝혀달라고 울부짖고 있는데, 돈 한 푼 던져주면서 ‘옜다 처먹어라’ 하는 정부! … 내 자식이 어떻게 갔나 진실을 밝혀달라는데 왜 이렇게 몰아붙여!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죽어.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아. 왜 죽었는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나는 알고 싶어!”


목발을 짚고 나온 호성 엄마 정부자씨가 절규했다. 그 후 의자에 앉아서 긴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고, 바리캉으로 밀었다. 긴 머리카락이 잘려서 떨어질 때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날 50명도 넘는 유가족들이 머리를 밀었고, 그런 다음에 안산으로 내려가 아이들 영정을 들고 1박2일의 행진에 나섰다.


2014년 전국적인 서명운동과 유가족들의 국회와 광화문광장 농성 등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게 진상규명특별법이었다. 그해 11월 국회를 통과한 특별법에 따라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3월말에 되어서야 시행령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정부가 발표한 시행령안은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고, 여기에 분노한 유가족들이 광화문광장에서 시행령안의 폐기와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정부에게 당부했다. 제발 돈으로 모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3일 뒤 정부는 액수를 부풀린 보상금을 지급 방침을 발표했다. 다시 참사를 돈으로 덮으려는 의도였다. 여기에 분노해서 집단 삭발을 단행한 것이었다.



유가족을 껴안은 교황


구조에는 무능했고, 거짓으로 일관한 국가는 유가족들을 탄압하고,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는 실력을 발휘했다. 1주기 추모제는 경찰의 차벽에 막혔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으로 유가족을 공격했다. 이런 모습은 10년 동안 일관된 것이었다. 때로는 모욕으로 때로는 무시로 유가족들과 시민들을 대했다. 진상규명을 해낼 것으로 기대했던 문재인 정부에서는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진상규명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 채 방치했다. 그런 결과 10년이 지난 지금, 세 차례의 국가조사기구의 활동이 종료된 지금에도 여전히 확인되지 못한 사건의 진실은 한참이나 남았다.


그렇지만 시민들은 깨어났다. 광화문광장에서 유가족들이 단식을 벌이자 함께 동조단식에 나섰고, 전국적인 서명운동으로 유가족들의 호소에 응답했다. 그해 8월 광화문광장,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그곳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셨다. 차에 올라 광화문광장을 돌다가 차를 멈추게 하고는 내려서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유민 아빠 김영호씨의 손을 잡아주었다. 단식 33일째를 맞고 있던 때였다. 교황은 차에서 내려서 김영호씨를 만나 안아줬다. 대통령도 정부도 집권당도 외면하고, 도리어 아들딸을 잃은 유가족을 공격할 때 교황은 차에서 내려 그를 안아주었고, 그가 건넨 세월호의 상징인 노란리본을 받아 가슴에 달았다. 노란리본을 달고 있는 교황에서 기자가 물었다고 한다. “교황님이 너무 정치적인 거 아닙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엔 중립이 없다”고 답했다.


기억은 힘이 세다


그럼, 우리는 10년 전의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나라의 재난 참사를 대하는 공식이 바뀌고 있다. 이전의 공식은 약간의 보상 후 장례를 치른 다음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령탑 하나 세우는 것으로 끝이었다. 참사의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 등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쉽게 외면되었다. 책임자는 항상 말단만 처벌되고 말았다. 그런 공식이 바뀌는 중이다. 피해자들이 먼저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보상을 거부하고, 국가를 상대로 배상책임을 물었다. 지난 10년 동안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활동이 피해자와 시민들의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시민들의 인식은 바뀌고 있다. 돈만 좇는 세상, 경쟁과 효율을 좇다가 생명과 안전은 뒷전으로 밀어왔던 그 결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는 각성이 광범위하게 일었다. 더 이상 사람이 죽어 나가는 비극이 없도록 하자는 공감이 형성되었다. 그런 힘으로 중대재해처벌법도 만들 수 있었다. 피해자들을 외롭게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피해자들의 권리가 말해지기 시작했고, 재난 참사 피해자들의 연대도 만들어졌다. 시민들의 접근성이 좋은 곳에 추모공원을 만들고, 인양한 세월호를 활용하여 추모와 교육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도 진행 중이다.


“기억은 힘이 세다”는 말을 종종 하고 듣는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를 잠시 미루어 두었을 때 거짓말처럼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 우리의 공동체가 안전해지려면 힘들어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죽음을 멀리 밀어놓는 게 아니라 가까이 두고 교훈을 되새겨야만 우리는 더 안전한 세상을 꿈꿀 수 있다.


10년을 이어온 애도의 공동체가 이제는 세월호만이 아니라 다른 재난 참사까지 품고 가는 그런 애도의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다시 한번,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자, 그 힘으로 생명과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을 밀고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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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래군 4·16재단 상임이사


※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우리의 마음을 세월호 참사 10주기 시민위원으로 응답해 주십시오. 
   (참여 링크 http://10thcyclecommittee.org/commit_info.php)


 


 


 



[가톨릭신문 2024-04-19 오후 3:07:5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