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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 작가 다이어리](15) 이창림 작가 | 2024-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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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은 놀이 너무 어렸을 때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는 이북에서 살다 6·25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이에요. 제 부모님은 누나와 저를 비롯한 자식들을 데리고 1·4후퇴 때 개성에서 인천으로 넘어오셨어요. 어릴 적 저는 조금 ‘덜 떨어진’ 아이였대요. 국민학교 3학년이 되도록 책도 못 읽을 정도로요. 그런데 혼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종이든 벽이든, 어디는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요. 부모님께서는 그런 저를 그대로 두셨고 중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그림을 그렸어요. 대학 진학은 디자인 쪽으로 하려고 있는데, 떨어져서 조소과에 들어가게 됐어요. 조각 일을 하다 보니 또 그게 좋더라고요. 조각은 자연과 만나잖아요? 흙이나 돌, 나무, 이런 자연과 가깝죠. 또 자연은 조각가와도 같다고 생각해요. 오랜 세월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깎거나 덧붙여 아름다운 자연을 재창조하니까요. 대학 졸업 후에는 잠시 직장에 다니기도 했어요. 보통 미대생들은 졸업하면 중고등학교 교사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졸업하던 때에 조폐공사가 공채에 나섰고 운 좋게도 합격했어요. 디자인실에서 근무했는데, 1년은 재밌더라고요. 지폐와 수표 외에 훈장이나 메달, 공무원 신분증 등도 만들었죠. 그런데 회사 생활의 미래가 보였어요. 시간이 지나면 과장이나 부장이 되고, 더 잘 나가면 이사가 될까 말까한 거예요. 미래가 보이니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더 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갔죠. 고(故) 김세중(프란치스코) 선생님이 대학원 학장으로 계셨는데, 제게 조교를 시켜주셨어요. 당시 국립대 조교는 중고등학교 교사 월급 정도 받았어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모두 돌아가셨어요. 누나와 동생 둘이 남아있으니, 형편이 딱했죠. 김세중 선생님은 학부 때에도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부모님을 여의고 난 후였는데, 국립극장에 설치할 ‘군무’라는 작품을 만들고 계셨던 선생님께서 저를 조수로 불러 일을 시키고 생활비도 주시곤 했거든요. 대학원을 마치고 부산대를 거쳐 한국교원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각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죠. 그렇게 제게 조각은 일종의 놀이예요. 작업하는 시간은 제게 휴식 시간과도 같고요. 아내는 특별한 일 없으면 하루 종일 조각 일을 하는 저보고 ‘일 좀 그만하고 쉬어라’라거나 ‘어디 놀러가자’고 하는데, 전 ‘지금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어딜 가냐?’고 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조각 일이 무척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요. 하지만 조각은 마치 연금술사처럼 자기 마음껏 조화를 부려볼 수 있는 일, 자연과 세상을 자기 틀에 맞춰 보는 퍼즐게임 같은 일이에요. 주로 가족상을 많이 만들었어요. 딱히 가족상을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걸 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가족상은 부산대 시절부터 많이 만들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산가족이어서 그런지 가족에 대한 애정이 컸고, 당시 제가 막 결혼했던 시기였기도 하고요. 성미술 작업하며 신앙심도 커져 아버지께서는 공립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공립학교 교사들은 때가 되면 여기저기 전출을 다녀야 하잖아요. 4남매를 키우시던 아버지께서는 자주 이사 다녀야 하는 공립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사립학교로 옮기셨어요. 바로 인천에 있는 박문초등학교였죠.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근무하려다 보니 아버지께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셨고, 저도 따라다니게 됐어요. 성미술 작업은 김세중 선생님을 도와드리면서 시작했어요. 선생님께서 서울 가르멜수녀원의 십자가상을 만드셨는데, 은행나무로 깎아놓은 것에 왁스 칠을 하고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렸어요. 그리고 수녀원에 선생님께서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성모자상을 보수하는 일을 했는데, 그게 두 번째였어요. 제가 처음으로 직접 만든 건 광주 방림동성당 부활상이었어요. 선생님께서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네요. 이후로, 서울 역삼동성당, 반포성당 성물 작업 등 많이 참여했어요. 성미술 작업이라는 게 참 어려워요. 일반 작품하고는 다르니까요. 일반 작품은 제가 하고 싶어서 즐겁게 해요. 내 눈에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다녔던 청주 영운동성당 주보 성인상을 제작한 적이 있어요. 저를 비롯해 신자들이 성당에 들어가면서 성상 앞에서 기도하는데 자꾸 제 부족함 때문에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제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서 순수와 지고의 경지에 올라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더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성스럽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성미술 작품을 할 수 있겠어요? 스스로 우러나오는 신앙으로 작업해야죠. 요즘에는 성미술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모자상도 성모님과 예수님이 아니라 옆집의 모자와 같이 느낄 수 있게요.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성당에만 계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또 아이들을 위한 예수상도 많이 만들어요. 규범화되고 정형화된 것을 깨고 아이들을 위한 예수님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톨릭 성미술 작가들도 이런 작업을 많이 하면 좋겠어요. 우리 일상에서 친구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친숙한 친구같은 예수님을 표현하면 어떨까요. 지금처럼 신자들이 줄고 있는 상황에서는 특히 이런 시도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이창림 라파엘 작가는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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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4-19 오후 3:07:52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