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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일기」 바탕 103위 성인 중 기해박해 순교자 70위 탄생 | 2024-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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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 1839년 서울 박해 보고서 작성 기해박해 순교 성인과 복자가 많은 이유는 당시 순교자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토록 어려운 시기에 소중한 순교기록을 남겼던 것일까? 사실 프랑스 선교사가 오기 전에도 우리 조선의 신자들은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잘 남기고 있었다. 예를 들면 첫 순교 복자인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재판 기록이 「죄인지충일기」라는 한글로 번역되어 신자들에게 유통, 그의 순교 신심을 본받도록 했다. 한글본은 유실되었으나 그 내용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전해지고 있다. 감사 : “그래, 천주교라는 종교가 미신이 아니란 말이냐?” 지충 : “천주는 가장 높으신 아버지시요, 하늘과 땅과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창조주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또 황사영의 「백서」에도 많은 순교자에 대한 기록과 한국 교회의 초기 기록이 담겨 있다. 이승훈이 이벽의 영향을 받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도 바로 「백서」를 통해 전해진다. “계묘년(1783)에 아버지(이동욱)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이 그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서양 선교사가 있으니, 자네가 가서 찾아보고 신경 한 부만 달라고 하며 세례를 받기를 청하면, 선교사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할 것일세.’ 이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세례를 청하자, 여러 신부는 영세하기에 필요한 도리를 모른다고 영세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양 신부님(그라몽)이 세례를 주고 또한 교회 책도 많이 주었습니다.” 이처럼 선교사 한 분도 없이 기도 공동체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는 그 소중한 신앙의 역사와 순교의 기록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다.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지 1년이 겨우 지난 때였다. 박해의 조짐이 느껴지자 그는 실시간 전해 들은 박해 기록을 정리하여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라는 문건을 작성해 파리 본부로 보냈다. 이 보고서는 1838년 12월 21일부터 1839년 8월 7일까지의 조선 박해 상황과 순교 혹은 배교하는 신자들의 소식을 일지 형식으로 전하는 자료로, 후에 「기해일기」로 발전되고, 79위 복자가 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됐다. ‘사학토치령’ 공식 반포 이전 기해박해 시작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후 서울 후동(后洞, 현 중구 산림동·주교동) 정하상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어를 배우고, 3개월 후에 고해성사를 주면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사제 양성을 위해 정하상·이재의 등 4명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평신도 통역자들을 통해 기도서를 새로 번역하도록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앵베르는 신자들의 입장에서 항상 먼저 배려하고 조선인들과 조선 풍습을 매우 관대하게 바라보며 사목을 펼쳐나갔다. 1년이 지나자 좀더 먼 지역까지 사목 방문을 위해 서울 밖의 도시들로 나갔다. 그러나 박해 조짐이 보이자 다시 한양으로 들어가 박해를 대비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돈독히 하는 데 집중하고자 했다. 여기서 1839년 기해박해의 배경을 간략히 짚어보자. 이때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던 시기였다. 본래 순원왕후는 김조순의 딸로서 천주교에 비교적 관용적인 안동 김씨 집안에 속했다. 그러나 국왕 순조의 외척인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로부터 정치 권력을 탈취하려는 데에서 천주교 박해가 이용되었다. 기해박해는 1839년 4월 18일 천주교를 금하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공식 반포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권득인·최해성·박아기 등의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구산의 김성우와 그 형제들이 체포되었다가 돈을 주고 풀려나기도 했다. 배교자 김순성 등의 밀고로 최경환 일가가 살고 있던 수리산 교우촌이 발각되었고, 앵베르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도 추적당하게 되었다. 박해가 심해지자 세 선교사는 수원의 ‘상귀’라는 피난처에 모여 회의를 하고, 모방과 샤스탕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려 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은신처에서 숨어있었는데, 함께 있었던 정화경(안드레아)은 배교자 김순성의 말에 속았다. 즉 “이제 조정에서도 주교님과 신부님이 나타나면 천주교를 받아들일 것이며, 정하상이 주교님께 드리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다. 정화경은 김순성을 데리고 주교의 은신처까지 갔다. 정화경이 주교에게 찾아가 종교의 자유가 임박했다고 전하자, 앵베르 주교는 “네가 마귀의 속임을 입었다”며 더 이상 피난할 수 없음을 알고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앵베르 주교는 심문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사형당하는 신자들 소식을 들으며, 선교사들이 모두 죽어야만 이 박해가 끝날 것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두 선교사에게 글을 적어 자수하기를 권하였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신부들이 아직 배를 타고 떠나지 않았으면 손계창(포도부장)과 함께 오시오.” 세 명의 선교사와 평신도 지도자 대거 순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는 부모님께 올리는 마지막 편지를 쓰고, 파리 본부에 보내는 마지막 보고서를 마치고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하였다. 두 신부는 9월 6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모두 9월 21일 군문효수형을 받아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세 명의 선교사 외에도 최경환·정하상·유진길 등 뛰어난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 시기에 순교하였다. 이 가운데 최경환(프란치스코)은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로, 신앙생활을 위해 수리산 교우촌에 살다가 체포되어 옥사했다. 정하상(바오로)은 순교자 정약종의 아들로, 평생 성직자 영입 운동에 헌신하면서 자신도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 교육을 받던 중 서소문 밖 네거리 사형터에서 순교하였다. 한국 103위 성인 중 기해박해 순교자는 모두 70위(位)이다. 이처럼 많은 순교 성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839년 당시의 기록들이 그들의 참된 신앙과 순교를 증거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앙의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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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4-17 오후 1:52:11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