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기 철도기관사가 자신이 타고 온 화물열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어릴 적 변치 않던 사제의 꿈
수능 망치고 인생 끝났다 좌절
망가지고 탈선했다 다시 주님 곁으로
“결혼하고 세 아이 낳아… 신기할 뿐
그 분 계획 안에 제가 있다고 생각”
20년째 하느님과 함께 선로 위 달린다
말씀 없는 아버지와 2년간 같이 근무
기차 주제로 대화 많이 하게 돼
정차역 통과하는 악몽 부자가 같이 꿔
“하느님 아버지 꿈 따라 사는 아들될 것”
어릴 때 그는 주님만 따르려 했다. 사제가 돼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와 술잔에 주(酒)님을 따르고 있다. 복음은 아니지만 전하는 것도 있다. 바로 세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다. 그리고 그의 주 활동 무대는 성당이 아닌 기차 기관실이 됐다. 기차를 운전하며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사람의 사연을 전하고 있는 홍인기(비오, 대전교구 세종성프란치스코본당) 철도기관사의 이야기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타인의 삶’. 홍인기 철도기관사를 만났다.
조용하지만 소란스러운 만남
목소리가 선한 사람이 있다. 선한 목소리를 들으면, 선한 얼굴이 그려진다. 홍 기관사가 그랬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 대전역으로 갔다. 도착 시간에 즈음해 승강장을 서성였다. 그때 멀리서 우렁찬 기적 소리와 함께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소리처럼 선한 눈매에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가 기차에서 내렸다. 기자에게 인사하는 그에게 “빨리 사진부터 찍자”고 했다. 1분 남짓한 기관사 교대 시간에 맞춰, 그가 타고 온 열차를 배경으로 신속히(?) 촬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린 기차의 출발 신호가 떨어졌는데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렀다. 고맙게도 교대 기관사는 출발 신호에도 기자를 기꺼이 기다려줬고, 덕분에 홍 기관사와 기차를 사진에 담았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이제 정말 그를 만났다.
주님의 다시 부르심
홍 기관사의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단 한순간도 사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태 신앙을 이어받은 그는 고교 3학년 때까지 미사 한 번 빠진 적 없고, 본당의 여러 일을 도맡아 봉사했다. 주변 사람들도 그를 ‘학사님’, ‘예비 신부님’이라 불렀다. 당연히 사제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국영수를 더 열심히 했어야 했나봐요. 그해 수능시험을 너무 망쳤어요. 그래서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죠. 저를 버리셨다고요.” 그는 울면서 사제관을 뛰쳐나와 도망치듯 성당을 떠났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했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았고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때부터 탈선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가서 살기도 했고, 어두운(?) 곳에서 험한 일을 하며 살기도 했다.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에 그는 망가졌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결국 그를 지치고 힘들게 했고 기댈 곳은 신앙뿐이었다. “힘드니까 기도하게 되고 성당을 찾게 되더라고요. 결국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성당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생활성서사에 글도 쓰고, 지금은 가톨릭평화신문 인터뷰도 하고 있잖아요? 망했다고 생각한 인생이 이렇게까지 돼가는 과정이 신기할 뿐입니다. 제가 사는 게 아니라 그분 계획 안에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성경 대신 운전대를 잡다
“먹고 살려고요.(웃음)” 그의 답변은 장애물 없는 선로 위를 질주하는 기차인 양 거침없고 솔직했다. ‘왜 철도기관사가 됐느냐’는 물음에 적어도 ‘철도기관사가 꿈이었다’, ‘철도기관사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등의 답변은 아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대전에 지하철이 생긴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학원들이 생겨났다. 학원에 다니면서 시험을 준비하던 중 아버지로부터 철도기관사 시험에 대해 들었다. 과목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는 인생 선로를 변경했다.
“철도기관사인 아버지가 힘써줬다는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철도기관사가 할 수 있는 건 운전 말고는 없어요. 철도기관사는 표를 쉽게 구하는 줄 알고 주변에서 종종 부탁하시는데, 그때마다 저도 직접 표를 사서 드립니다.(웃음)” 그의 말대로 생계를 위해 철도기관사가 됐고, 현재 육중한 화물열차와 무궁화호·새마을호를 운전한다. 기차 이야기를 할 때 반짝이는 눈과 커지는 목소리에서 남다른 자부심이 느껴졌다.
철도기관사로 그가 지나온 20년
춥지도 않은 기관실에서 벌벌 떨었다. 손에서는 계속 땀이 났다. 연신 십자성호만 그었다. 부기관사로 9년간 근무하다 10년 만에 기관사가 된 그가 처음 혼자 운전하던 날이었다. “새벽인 데다 눈은 오고 전기 관련 오류도 자주 생기고 최악의 조건이었어요.”
기차를 운전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차역을 지나쳐 기차를 쫓아와 탄 승객에게 사과한 일, 특히 기차 뒤쪽 선로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은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은 일이 그랬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는 자신이 운전하던 기차에 누군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에 한동안 아픈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하면서 기쁨은 더 컸다. 아이들이 기차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던 일, 정차했을 때 창문을 열어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었던 일이 그랬다. “가장 좋았던 건 아버지랑 2년간 같이 근무한 거예요. 정말 말씀이 없으신데 일하면서 대화라는 걸 처음 해봤죠. 그 후로 지금까지 아버지와 많이 대화해요. ‘기차’를 주제로요.”
처음 벌벌 떨면서 십자성호를 그으며 운전대를 잡았던 초보 기관사는 어느덧 20년 차 베테랑 기관사가 됐다.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때면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만끽하고 마주 오는 열차에 손을 흔들며 기관사로서 기쁘게 살고 있다. 지금도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기도다. ‘주님, 오늘도 제가 운전하는 기차가 무사히 당도할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십시오.’
홍인기 철도기관사
기차, 삶의 일부가 되다
“어느 날 대전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렸는데 고교 3학년 시절 본당 주임 신부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울면서 도망치고 나서 신부님을 처음 만난 거였는데, 마침 정복까지 입고 한껏 꾸민 날이었거든요. 그날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인기, 너 성공했구나!’ 그 말씀에 많은 게 담겨 있는 것 같아 뭉클했죠.”
철도기관사로 살아온 20년, 기차는 그의 삶이 됐다. 그는 “참 다행”이라고 했다. 기차가 주는 매력의 향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게 다가온단다.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싣고 달리는 일이라 더 그렇다. 창문 밖 시시때때로 변하는 풍경을 보는 때가 많은데, “특히 벚꽃이 만개하거나 함박눈 내리는 날엔 마치 매달 바뀌는 달력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했다. “선로에 수북이 쌓인 눈 위를 처음 지나갈 때는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죠. 기차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입니다. 이젠 제가 매력적일 일만 남았어요.(웃음)”
그는 20년째 하느님과 함께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기적을 울리며 살다 보니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기차를 운전하며 살았지만 기차가 오히려 저를 달리게 해준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속도를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빨리 가려고 속도를 높이면 제동을 해야 하고, 그러면 멈추게 되기에 더 늦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속도 조절을 하는 게 오히려 더 빠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천히 가되 제대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앞으로도 그렇게 가보려고요. 은퇴하신 지 15년 넘은 아버지가 아직도 정차역을 통과하는 꿈을 꾸신대요. 악몽은 은퇴가 없나 봐요. 하하. 그런데 저도 가끔 그런 악몽을 꾸거든요. 제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봐요. 이젠 아버지와 꿈마저 똑같이 꾸고 살아요. 신앙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꾸시는 꿈을 따라 사는 아들이 되려고요.”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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