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뉴스
- 전체 2건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부엉골 : 신학교의 설립 | 2024-04-17 |
---|---|
경기 여주 강천면 부평리 581. 부엉이가 많았다고 해서 부엉골이라 불리던 이곳에는 박해 시기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려던 선교사들의 열망이 가득했다. 전국 구석구석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외진 이곳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아직 박해가 끝나지 않은 1885년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 신학교 설립을 위한 노력 파리 외방 전교회는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래 꾸준히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고 활동했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 조선인의 힘으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36년 첫 번째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성 김대건(안드레아)·가경자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이후로도 신학생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페레올 주교는 1850년 병으로 사목 순방을 다니기 어려운 성 다블뤼 신부에게 신학생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1854년에는 이렇게 국내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3명의 신학생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을 통해 사제를 양성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여러모로 어려움이 컸다. 어린 신학생들이 유학길을 견뎌야 했을 뿐 아니라 현지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리거나 최방제의 경우처럼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조선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박해 때문이었다. 성 앵베르 주교도 성 정하상(바오로) 등을 비롯한 신학생을 국내에서 양성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 성 요셉 신학교 설립 마침내 1855년 메스트르 신부는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했다. 성 장주기(요셉)가 배론 교우촌의 3칸짜리 초가집을 봉헌해 신학교 건물로 사용했고, 1856년 입국한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임명됐다. 초기 성 요셉 신학교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이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 신학생들은 다른 마을에 거주하면서 학교를 오가기도 했고, 비신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소리 내서 글을 읽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신학생들이 박해를 피해 안전하도록 밤낮으로 좁은 방안에서 문을 닫아걸고 공부하다 보니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1865년 푸르티에 신부는 서한을 통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 신학교의 학생들은 거의 환자로, 이러한 병의 원인은 장소의 협소함보다는 운동과 활동의 부족에 있다”면서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나의 불쌍한 학생들은 낮이나 밤이나 문을 굳게 닫고, 병에 걸린 상태에서 공부한다”고 전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성 요셉 신학교는 점차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1861년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학교 교사로 합류해 교육체계를 다져나갔다. 신학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교 교사를 맡은 두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하면서도 교리서를 번역하고, 또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페낭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도 1861년과 1863년에 귀국해 성 요셉 신학교로 편입하면서, 10여 명의 신학생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배론 교우촌을 방문한 베르뇌 주교가 신학생들에게 삭발례, 소품(小品)을 주는 성과도 있었다. 대품(大品)을 통해, 또 한 명의 조선인 성직자가 탄생하는 것도 머지않은 일처럼 보였지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신학교는 1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게 된다. 당시 성 남종삼(요한)을 체포하기 위해 제천에 왔던 서울의 포졸들이 서양 선교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 요셉 신학교를 급습했던 것이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이때 체포돼 3월 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 신학교의 부활 병인박해의 피해는 컸지만, 선교사들은 여전히 조선인 사제 양성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교 설립을 지시했고, 마땅한 자리로 찾은 곳이 부엉골이었다. 배론의 신학교처럼 박해로 신학교가 와해되지 않기 위해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부엉골본당 주임을 맡았던 가밀로(Camile Bouilon) 신부는 “로베르 신부는 오직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이 험난한 산속의 마을 부엉골보다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1885년 부엉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숲에서 통나무를 베고 진흙 벽돌을 쌓아 초가집을 짓고 신학교를 세웠다. 20년 만에 다시 신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부엉골에 다시 세워진 신학교 교장을 맡은 마라발 신부는 신학교를 ‘예수 성심 신학교’라 명명했다. 페낭 신학교에서 귀국한 신학생 4명과 국내에서 입학한 신학생 3명이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엉골에 자리했던 신학교는 2년 만에 용산으로 이전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박해가 종식되면서 더 이상 깊은 산골에 숨어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1945년 다시 서울 혜화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금의 가톨릭대학교로 이어오기까지 수많은 한국인 사제를 탄생시키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
|
[가톨릭신문 2024-04-17 오전 10:32:08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