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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닮아감으로 얻는 자유 2024-04-17


하느님과 화해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여정은 타인과의 화해로 완성된다. 셋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웃과 다투며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세 가지 화해 중 가장 어려운 것을 들라고 한다면 대부분 이웃과의 화해를 들지 않을까?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들로 인한 상처를 가슴 속 깊이 안고 살아간다.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신뢰가 컸던 만큼 배신으로 인해 받는 상처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신부님,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미워하며 욕하고 사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답이 아님을 서로 잘 알기에 고민하게 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감을 준 그 사람,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부아가 치미는데, 용서하라니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이 야속할 때도 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렇다면 왜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과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우리를 더욱 높은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가 아닐까. 우리의 성소(부르심)는 저 높은 곳에 있다. 땅 위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이 아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부르심이 우리 존재 깊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진정한 자유로 부름을 받은 존재다. 그 자유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원한과 분노, 시기와 질투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타인과 살면서 겪는 불편한 마음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아버지와 같이 너그러운 존재가 아니기에, 조그만 일로도 타인과 쉽게 등지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산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러한 삶을 넘어서려는 열망도 있다. 우리는 자유롭고 싶다. 그 자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가 아닌,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마음에서 오는 자유다. 그럴 수 있다고 받아줄 수 있는 자유, 타인의 다름과 독특함을 인정할 수 있는 자유, 모든 사람이 부족하나마 저마다의 길을 걸으며 변화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오는 자유가 있다. 매일 자기를 죽이고, 예수님 마음을 닮아가며, 세상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알아볼 수 있는 마음에서 오는 자유가 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걷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아가며 마음이 넓어지고 깊어지며 많은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로 변화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다.

지금 용서가 안 돼도 괜찮다. 지금 마음이 힘들고 흔들려도 괜찮다. 그럴 때는 용서가 안 되는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말고, 그러한 마음까지 기도 안에서 주님께 말씀드리며, 그분께 의탁하고 위로를 청해보자. 주님께서만은 나의 힘든 마음을 알아보시고, 공감하시며, 보듬어 안아주실 것이다. 이내 그분에게서 다시 일어설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섬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예수님처럼 변화할 수 있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4-04-17 오전 7:52:05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