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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 제사 음식 나눔·전통 혼례 인정… 우리말 기도문 새롭게 번역 | 2024-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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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겨울 조선 땅을 밟은 첫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모방 신부가 조선에 첫발을 딛고, 그 해 겨울 세 신학생을 유학 보내면서 대신 중국에 있던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1년 후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Imbert) 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주교로서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하기까지 조선 교회는 3명의 선교사가 이끄는 대목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앵베르 주교의 사목 방침은 어떠했을까? 앵베르는 사제 수품 후 중국 사천(四川) 선교사로 임명되어 12년간 사목활동을 하면서 티베트와의 국경에 모팽(Moupin) 신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해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대목구 관할을 수락했을 때,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편지를 직접 보내기도 하였다. “주교님께서 교황님(그레고리오 16세)으로부터 새롭고 매력적인 조선 선교를 출범시키는 일에 선택되신 행운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우리 주님의 포도밭 중에서 주목을 끄는 이곳(조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제 의향을 들으시어 저를 주교님의 새로운 선교지에 불러 주시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주교님께 도와드리고 싶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대목구에서 행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통상적인 권한에 관한 간단한 증서를 만들어 보내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청합니다. …저는 중국 글자를 조금 알기 때문에 주교님께서 신학교를 세워서 그 나라 사제를 양성하시는 데 쓰임새가 있을 것입니다.”(앵베르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1833년 8월 10일 자 서한) 조선의 문화 관찰하며 신자들 어려움 배려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가기도 전에 모방·샤스탕·앵베르 선교사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으로 제2대 대목구장에 앵베르 신부가 임명됐다. 그리고 그는 1837년 겨울 조선 땅을 밟은 첫 주교가 됐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의 문화를 잘 관찰하면서 신자들의 어려움을 배려하는 사목을 하였다. 먼저 조선의 제사 문화와 제사 음식을 나누는 풍습에 주목했다. “신자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과 가장 부담스러운 장애물은 제사에 참여하는 일과 제물(祭物)입니다. …그 중 일부만 제사상에 올리고 이를 집안 식구들이 나누어 먹으며 제사상에 올리지 않은 음식은 종들을 시켜 인근 2~3레우카(1레우카=3.25㎞) 이웃들에게 보내서 나누어 먹는데 이를 받지 않는다면 큰 모욕이나 적의의 표시가 됩니다. …2년 전 모방 신부가 와서 과도한 열심으로 지나치게 생각하여 성사를 막는 벌을 부과하면서 이런 제사 음식을 절대로 받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제사 음식을 받지 않자) 신자들은 (외교인 이웃들로부터) 혹독한 학대를 받았고, (결국 제사 음식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때문에 양심의 심한 가책을 당하였습니다. …‘제사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주십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한 받아도 되지만 만일 제사에 대한 말을 하며 나누어 줄 때에는 사양하고 받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실제로 제사에 대한 말은 거의 하지 않고 ‘떡을 좀 보낸다’고 말합니다) …이 받는 행위가 제물(祭物)이 아니라 이웃 양반의 자비로운 은혜의 표시로 생각하면 한다는 판단입니다.”(교황청 포교성성에 보내는 1838년 12월 1일 자 서한) 앵베르 주교는 제사 음식을 나누는 조선의 풍습을 잘 관찰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하면 신자들에게 도움이 될지에 기준을 두고 판단해 융통성 있게 결론을 내렸다. 모방 신부가 엄격하게 제사 음식을 받지 않도록 금지한 반면, 제사 음식이라고 명시적으로 듣지 않는 한 받아도 좋다는 지침을 내린 것이다. 받아도 좋다는 것은 먹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사례가 나타난다. “조선 사람들은 혼인 예식을 거행할 때 허례의 일종으로 살아 있는 기러기를 흔히 사용합니다. …기러기를 가지고 신랑이 말을 타고 장인의 집으로 가서 아내를 맞이합니다. 신랑은 말에서 내려 안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기러기를 놓고 거기 꿇어 머리가 땅에 닿게 세 번 하늘을 향하여 경배합니다. 그 후 신랑의 들러리가 기러기를 집어 장모에게 건네주면 장모는 기러기를 가지고 여인들이 모여있는 방으로 가서 자기 딸에게 줍니다. 신랑은 남자들의 방으로 가서 장인에게 인사합니다. …신자들이 기러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항의합니다. ①많은 외교인 친척과 친지들이 혼인식에 참여하러 오는데 신자인 것이 탄로 날 위험이 있어서, ②아무런 미신 행위가 없고 비신자들도 기러기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합니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의 전통 혼례에 삽입된, 기러기를 주는 예식이 유교 예식서에서도 ‘서로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며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이 영원히 정절을 지킨다’는 좋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예로 들어 신자들에게 이러한 예식을 허용하도록 포교성성에 요청했다. 뜻 모를 한문식 발음 기도문 우리말로 번역 무엇이든 신자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었던 앵베르 주교의 큰 업적 중 하나는 당시 통용되던 기도문의 새로운 번역이었다. “저의 두 번째 걱정거리는 매일 기도와 주일 미사경문의 조선말 번역입니다. 천주교가 들어온 시초에 조선 신자들은 자기 재능에만 심취하여 조선말을 경시하는 생각으로 조선말이 천주께 기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기도문을 그 뜻까지 번역하지는 않고 뜻은 전혀 모르는 채 발음만 조선식으로 하여 바쳤습니다. …네 명의 통역을 데리고 공동 기도문들을 번역하여 지금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유식하든 무식하든 모든 신자가 열심히 배우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1838년 12월 1일 자 서한) 한문을 해독하던 양반과 중인 평신도 중심의 한국 교회는 시초부터 천주께 기도할 때는 한문을 사용하기로 결의한 것 같다. 그래서 주요 기도문이 완전히 번역되지 않고 한문식 발음으로 표현되었는데, 앵베르 주교 시대에 비로소 한글로 번역되어 평민들도 모두 외우며 발전하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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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4-09 오후 4:52:04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