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2] 삼위일체: 템페라, 안드레아 루블료프 삼위일체 작품 모작, 120 x 94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붉은색으로 권능을 강조한 성부의 위에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 2)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의 집이 있으며, 성자의 뒤편에는 생명 나무가 있고, 성령의 뒤편에 바위를 둠으로써 신앙을 굳건히 하는 성령을 표시하고 있다. 앞에 놓인 그릇에는 대접하기 위한 송아지 머리가 들어있다. 그것은 희생을 의미하며 성자께서 축복하신다. 발판을 보면 역원근법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성자 앞 탁자의 선(線)과 성부와 성령의 무릎으로부터 발까지 이어진 선을 연결하면 커다란 잔이 이루어지고, 그 잔 위에 성자께서 성체의 모습처럼 보인다. 성자 하느님의 오른쪽 어깨로부터 밑으로 내린 황금색 띠처럼 보이는 것은 ‘클라부스’라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뜻이다.
권능 상징인 붉은 색 성부와
왕이신 자색 성자와
생명이신 녹색 성령께서 의논하시는 모습…
선이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리듬과
투명한 듯 밝은 의복 색채까지
모두 아름다운 조화
2. 빛의 흐름
나라마다 빛을 내어주는 태양신에 대한 신화는 많습니다. 빛은 신성(神性)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빛은 생명·행복·율법·지혜와 결부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초월적 성스러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즉 타보르산에서 그리스도의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부활과 다시 오심’을 미리 보여준 상징이었습니다. 빛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금 구약에서 드러난 야훼의 영광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빛 중의 빛이며 세상의 빛이었습니다.(요한 1,1-14 참조)
조화와 비례는 아름다움을 측정하는 기본 원리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빛은 조화나 배합에 의하지 않고도 그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고 그에게서 나온 빛이 아름답다면, 그와 닮은 우리 안에도 빛이 있기에 충분히 영적·심미적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빛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안도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 서적에서 영성(靈性)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면서 그 의미도폭넓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영성은 바오로 서간에 나타납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곧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 합니다. 영적인 사람(1코린 2,13-15 참조)이란 물질적인 실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의 영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성이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신앙 서적에 요약하였습니다. 영성은 마음의 고요(정적) 안에 머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빛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 빛은 환하고 따뜻하기에 주변 모든 사람을 환하게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작품1]
[작품1] 바오로 사도: 템페라, 198 x 106cm, 안드레아 루블료프 작품, 15세기 초, 트레차코프 갤러리, 모스크바. 작가의 화법에 따라 좁고 둥근 형태의 어깨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겸손을 강조한다. 이마는 밝게 빛나며 지혜가 가득한 지성을, 눈은 고요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안드레아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성화입니다. 고요함과 침묵으로 영혼의 평정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 이콘은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참나무 아래에서 손님 대접했던 세 천사의 모습(창세 18장 참조)이 담겨 있습니다. 세 천사는 서로 마주 보며 걸터앉아 있고, 정적인 동시에 부드러운 움직임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권능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성부와 왕이신 자색의 성자와 생명이신 녹색의 성령께서 조용히 의논하시는 듯합니다. 세 분의 구성이 ‘고요한 어울림’이란 단어를 연상케 합니다.
루블료프는 색을 강하게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옷을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으로 나누어 표현하였습니다. 외부의 빛은 약간의 청회색에서 백색으로 내려와 옷 위를 비추고, 내부의 빛은 옷이 접혀 어두운 부분을 오히려 황색으로 칠해 은은하게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 선이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리듬도, 투명한 듯 밝은 의복의 색채도, 모두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내면적이면서도 생명의 근원에서 비롯한 분위기는 정적·위안·따뜻함·기쁨·평안을 느끼게 합니다. 정적주의가 추구하는, 즉 신을 향하는 관상이 이 세상에서도 주어진다는 것을 이 이콘은 깨닫게 합니다. 거의 투명한 의복으로 가려져 있는 천사의 젊고 부드러운 몸은 영적인 홀가분함과 위엄과 빛을 나타내고, 물질적인 중량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온몸을 감싼 옷과 다정히 대화하는 듯한 몸의 자세가 잘 어우러져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 분은 천사의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계십니다. 성부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강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붉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성부 하느님을 ‘강하신 분’이나 다른 한편에는 ‘무한한 사랑을 갖추신 분’이라는 의미로 루블료프는 외부의 빛과 접힌 옷 주름 사이에서 나오는 내부의 황색빛으로 붉은색을 부드러운 붉은 갈색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식탁 가운데 계신 성자 하느님은 청색 옷을 겉에 두르셨습니다.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기에 하느님의 색깔입니다. 그리고 세분 모두 청색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성자께서는 ‘밖으로 드러나신 하느님’이라는 의미로 청색 옷을 겉에 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화를 보고 있노라면 연노랑 달맞이꽃 색깔의 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들판을 산책하는 느낌입니다. 쏟아지는 빛의 소나기에서 고요함과 거룩함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고독과 고통과 근심으로 점철된 세상의 삶을 바라보며 잠 못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고뇌를 연상케 합니다.(시편 121, 4) 왜냐하면 성자께서는 잔 안에 놓인 송아지 머리를 축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잔 가까이 다가간 성자의 두 손가락은 인성과 신성을 의미하고, 보이지 않는 세 손가락은 합쳐져 삼위일체를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 이름으로 송아지 머리가 들어 있는 잔을 축복하시고, 사람을 위해 희생 제물로 오실 것을 은연 중 암시하는 듯 합니다.
성령께서 입으신 녹색은 나무에 새싹이 돋듯이 새 생명·희망을 상징합니다. 녹색 옷에도 외부의 빛과 접힌 옷자락을 어둡게 하지 않고 몸에서 나오는 내부의 황록색 빛의 흐름으로 부드러운 연두색을 보여줍니다. [작품2]
[작품3] 구세주: 템페라, 158×103cm, 트레차코프 갤러리, 모스크바, 러시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불행히도 이 구세주 이콘을 층계의 발판으로 사용하였다. 어깨가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겸손함을 느낄 수 있다.
루블료프의 작품 중 ''구세주'' 이콘이 있습니다. 루블료프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면서 신으로서 위엄을 극도로 강조하지 않으면서, 내면의 빛을 부드러운 선염법 채색 화면이 채 마르기 전, 다시 채색하여 번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채색법으로 그려냈습니다.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얼굴은 위엄과 우아함이 조화를 이루고, 정숙과 평안·침묵으로 보는 이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작품3]
앞서 말한 초대 교회의 근간에 깔린 신학 사상이 성 미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어쩔 수 없이 외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조건으로 하느님과 만남을 위해 큰 노력을 해왔습니다. 사상과 사유의 방법은 각기 달라도 결국은 서로 연관되고 영향을 주고받아, 결국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맥락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형부 마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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