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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아 평화칼럼] 부활을 맞이하였는가 2024-04-03

10년 전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를 기억한다. 304명의 목숨이 차가운 바다에 잠겨 있던 그 날, 나는 성당 앞 어두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앉아 있다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부활 선포와 함께 성당 안을 환하게 밝힐 빛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덤가가 되어버린 팽목항에 그가 상처 입은 그대로 남아 흐느끼고 계실 것 같았다. 부활 아침이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해 이후, 내게 부활 축일은 이전과 같지 않지만, 나는 이제 미사에 참여한다. 아직도 탈출기 14장 독서를 들을 때면 거대한 물의 이미지가 떠올라 몸이 움찔하고, 성당 앞 노란 개나리꽃들을 보면 노란 리본이 떠올라 마음이 저리지만, 세월호의 기억은 이제 내게 주님 부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세월호 10년, 나는 부활을 맞이하였는가?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것이 있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것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부활이 그런 것임을 배웠다. 부활은 한순간의 천지개벽도, 명징한 변화도 아니다.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알아보게 하는 것은 부활하신 이를 향한 나의 열린 마음뿐이다. 빵을 떼는 수상한 나그네의 손짓을 유심히 바라보다 문득 그가 살아 돌아왔음을 깨달은 제자들처럼, 아무럴 것 없어 보이는 정원사에게서 저를 부르는 그이의 음성을 들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부활한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 눈이 뜨이고, 내 귀가 열려야 한다. 미세하고 희미해 보일지라도 나와 이웃의 삶을 통해 매 순간 부활하고 있는 그를 내가 발견하지 못하면 폭력과 죽음의 세상을 살아낼 수도, 바꾸어 낼 수도 없다.

부활을 맞이하였는가? 나는 부활 이후의 삶이란 생명과 죽음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고통의 시간을 버텨오며 우리 중 누군가는 자신의 온 존재가 흉터로 바뀌어 버렸다. 이들이 남들처럼 웃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문 것이 아니다. 흉터를 존재에 아로새긴 채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더 간절하고 치열하게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의 기억은 언제나 무너짐과 혼란을 몰고 온다. 깨어지고 쓰러지고 흩어지는 일이 반복된다. 그래서 때로 민망하도록 지질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생명은 우리를 결국 일어서게 한다. 파스카의 신비란 그런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생명이기에 더 아름답고 끈질긴 것이다.

부활을 맞이하였는가? 나는 증오가 규범이 되어버린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불의한 세상을 향한 분노는 정당하지만, 증오는 아니다. 분노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며 감정의 격동이지만, 증오는 대상에 대한 태도다. 분노는 상황을 바꾸는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지만, 증오는 대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폭력으로 표출된다. 상대를 괴물로 만들고, 나 자신조차 괴물로 만든다. 분노가 축적되고 내재화하면 증오가 되기 쉽다. 분노를 전화하여 변화로 이끄는 힘은 결국 사랑이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모리배들 앞에서 그리스도는 분노했지만 증오하지 않았다.(마르 11,15-19)

그는 사랑을 선택했다. 세상을 파멸하는 대신 되살렸다. 자신을 증오한 이들 앞에서 오히려 자신의 몸을 잘게 찢어 생명의 빵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통해 되살아난다. 부활은 그런 것이다. 자신을 소멸하여 남으로 더불어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끝내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리라는 것을 미련하게 믿는 것이다.

부활을 맞이하였는가? 부활은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 나는 부활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가톨릭평화신문 2024-04-03 오전 11:12:0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