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 세상에서 꿈꾸듯 살다가, 정작 내가 사는 진짜 세상 어디쯤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고 방황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OSV
스마트폰 중독이라 할 정도로 쉴새 없이 SNS에 빠져 사는 남자가 있다. 아내가 말해도 자주 놓칠 정도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은 여느 부부처럼 다투면서도 또 가깝게 사랑하며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내는 커다란 슬픔에 빠진다. 그러다 남편의 챗봇(인공지능 채팅기능)과 대화를 시작하게 되고, 아내는 참았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면서 죽은 남편에게 집착한다. 그리고 남편의 목소리를 들을 방법을 찾으며 더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에 갇혀 산다. 급기야 남편과 똑같이 생긴 인조인간과 마주한다. 아내는 죽었던 남편이 돌아왔다는 기쁨에 행복해질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먹지도 자지도 않는 남편이 입력된 소프트웨어에 의해 행동하는 가짜남편이란 것을 알아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점점 이질적인 남편의 모습에 회의를 느낀 아내는 혐오감이 극대화되고 고통에 시달린다. 버릴 수도 없다. 생전 남편의 SNS 활동을 토대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조인간은 남편과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결국 인조인간 남편은 처리할 수 없는 물건들과 함께 다락방에 남는 씁쓸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는 찰리 브루커 감독의 ‘블랙미러’ 시즌2 에피소드 중 ‘돌아올게(Be Right Back)’로, 공상과학적 느낌의 영국 드라마다. ‘블랙미러’, 말 그대로 검은 거울이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텔레비전이 꺼지면 검은 거울이 된다.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모든 장면은 사라지고, 단지 나의 얼굴만 보여줄 뿐이다. 씁쓸하고 공허한 블랙미러를 보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말하는 것 같다. 스크린 속 세상에서 꿈꾸듯 살다가, 정작 내가 사는 진짜 세상 어디쯤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고 방황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하는 드라마다.
요즘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고 있다. 사진 1장과 음성 30초만으로도 죽은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인공지능 기술로 할머니를 부활시켜 손자와 챗GPT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공개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상현실에서 죽은 가족을 만나는 모습을 모 방송국이 다큐멘터리로 방영하기도 했다. 엄마가 죽은 딸을 가상현실로 만났지만, 만질 수도 껴안을 수도 없어 허공을 하염없이 휘젓는 장면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에 고인이 남긴 유품과 사진을 바라보고 한없는 슬픔에 빠진다. 화도 나고 절망과 공허함에 고통받기도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고인을 향한 죄책감이 마음 한편에 먼지처럼 스멀스멀 올라온다.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을 수용하고 차츰 회복되어 현실에 적응하고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이것이 보통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 과정이다. 좌절감에 부정하고 분노하면서 타협과 수용·희망의 여정을 거친다. 그렇게 지난한 세월을 거쳐 견디고 인내하면서 고인에 대한 기억이 따뜻한 봄날처럼 찾아와 새 생명이 움트고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고단하고도 먼 애도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스크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힘든 애도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고인에 대한 기억·유머·말투를 학습시킨 ‘디지털 클론’에 더 의지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가짜인 줄 알면서 진짜처럼 느끼는 스크린이 우리 일상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게다가 스마트폰을 끼고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이 남긴 디지털 발자국만으로도 실존 인물처럼 환생하는 것이 쉬운 일이 됐다. 인공지능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까? 만약 내가 죽었다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소환되는 일은 괜찮을까?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활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 죽어야 새롭게 태어난다. 부활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영구적인 현존(발타사르 H.U.v. Balthasar)’이다. 변하지 않는 무한한 실체다. 과학기술에 의해 기록된 것을 복원하는 재현이 아닌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현존, 보이지 않아도 ‘있음’이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영성이 묻는 안부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만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채봉 시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의 시작 부분입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단 5분 만이라도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 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죠.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어떠했을까요? 어쩌면 정채봉 시인의 시가 많은 이들 마음속에서 애틋하고 순수하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엄마가 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부활이 구원의 신비 안에 절정을 이루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는 고통과 모욕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고 사라짐으로써 지금 여기 무한한 현존으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아직, 이미, 그리고 지금,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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