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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염원했던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96년 만에 조선 땅 밟다 | 2024-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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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10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35년 10월 20일에 중국 마가자(馬家子) 교우촌의 펠리쿠(別拉溝) 지역에서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모방 신부가 ‘피엘리쿠(Pielikeou)’로 적고 있는 이 지역은 현재의 내몽골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송산구(松山區) 동산향(東山鄕)에 있다. 모방 신부가 전하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장면을 살펴본다. “(10월 20일 저녁) 주교님께 면도를 해드린 다음에 중국식으로 머리를 다듬는 조발을 마무리하는 순간 갑자기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를 지르셨답니다. (중국어로 ‘Ho Ya Yaille’) 이어 침상에 쓰러져 프랑스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셨는데, 이것이 주교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답니다. 옆에 있던 고 신부가 급히 달려갔으나 주교님은 한마디 말씀도 하지 못하셨답니다. 이에 고 신부는 병자성사를 드리고 전대사를 베푼 다음 옆에서 임종을 돕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저녁 8시 15분경에 주교님은 하느님께 당신 영혼을 바치셨다고 합니다.” 서만자 교우촌에 있던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소식을 듣고 곧바로 마가자로 가서 장례 미사를 봉헌한 후 주교의 시신을 안장하면서 무덤 옆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식 성(姓)인 ‘소(蘇)’자를 새겼고, 직책과 나이·선종일을 새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의 뒤를 이어 조선을 향한 선교 여정을 떠나 1836년 1월 13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서는 첫 번째로 조선에 발을 디뎠다. 그 뒤 순차적으로 샤스탕 신부·앵베르 주교가 들어오고, 병인박해(1866) 때까지 모두 20명의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왔다. 입국에 실패한 브뤼기에르 주교까지 합하면 모두 21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조선으로 파견됐다. 시간이 지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소와 비석이 어디 있는지조차 잊히고 있었다. 그런데 1897년 11월 29일에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담당 의사 마티뇽(Matignon, 개신교 신자) 박사가 마가자 부락을 방문하다가 촬영한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사진이 뮈텔(G.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주교님, 임파선 흑사병을 연구하려고 최근에 몽고(몽골)를 여행하던 중 펠리고(Pé-li-gô)에서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 사진을 찍었습니다.”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 맞아 유해 이장 이렇게 묘비가 어디쯤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1931년 서울대목구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중국의 달단 지역에 안장되어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로 이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는 동몽골대목구의 아벨(C. Abels, 葉步司, 1856~1942)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로 이장하기를 희망한다고 전하였다. 이에 대해 아벨 주교는 8월 16일 편지에서 “…주교님께서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유해를 조선으로 이장하시려는 뜻을 표명하셨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바르신 뜻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유해 이장에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말씀을 서둘러 드립니다.” 봉천에서 서울까지 유해 이장을 담당한 푸아요(Poyaud,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9월 4일 유해를 발굴하여 유해 상자에 넣고 서명한 후 9월 14일 송수저자(松樹咀子)에 있는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금주(錦州)본당을 거쳐, 봉천(奉天, 현 瀋陽)대목구청에 들렀으며, 묵덴 프랑스 영사 크레팽(P. Crépin)의 ‘유해 확인서’(9월 18일)를 받았다. 묵덴대목구장 블루아 주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경축이 성공리에 거행되기를 바라면서, 유해가 정해진 날(9월 24~25일) 서울에 도착하기를 희망하며 편지를 보냈다. 유해는 9월 22일 봉천을 출발하여, 안봉선(봉천~안동)과 경의선(서울~신의주) 철도를 이용하여 9월 24일 10시경, 서울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생전에 그토록 선교를 위해 들어가고자 염원했던 조선 땅을 선종한 지 96년 만에 밟게 되었다. 주교의 유해는 약 20일 동안 주교관에 안치되었다가, 10월 14일 새로 마련된 관에 입관하게 되었다. 10월 15일 명동대성당에서 장엄 연미사가 봉헌되었으며, 자동차와 상여로 운구되어 용산 삼호정(三湖亭) 교회 묘역(현 용산성당 성직자 묘지)에 예절대로 안장되었다. 1931년 10월 15일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 “소 주교의 백골을 중국 직예성(熱河省의 오류) 마가즈, 혹 뻴니구라고도 하는 곳에서 옮겨왔는데, 비록 96년 된 백골이나 모든 골격이 다 완전할 뿐만 아니라 두발과 또는 그 머리를 덮었던 비단 모자까지 썩지 않았으니, 귀한 시체이므로 귀하게 보존되었다. …이번 달 15일 오전 9시에 두 분 주교께서 대례 연미사를 거행하시고 사도예절을 마친 후 자동차 상여에 모시어 용산 삼호정 교회 묘역으로 발인할 때 …묘역 근처에 이르러서는 약현본당 교우들이 미리 가져온 교회식 조선 상여에 옮겨 모시고 묘역에 들어가서 모든 주교·신부 무덤 가운데에 예절대로 안장하였다.”(경향잡지, 1931년 10월 15일) 이처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용산 성직자 묘지에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 마가자에 있는 원 무덤 자리와 묘비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경 마가자 인근의 대장방촌(大杖房村) 구판협동조합 건축 때, 사람들은 주교의 묘비를 옮겨와 섬돌(돌층계)로 사용하였다. 묘비는 한동안 그 존재조차 잊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5년경에 구판협동조합 매입자인 왕자춘(王子春)이라는 이가 묘비 섬돌을 확인하고 동산 천주당에 알렸고, 그 지역의 이금도(李金濤) 신부는 2006년 1월에 원 묘비를 촬영한 후 1월 12일 성당으로 이전하면서 서울대교구 개포동본당에 알리고 사진을 전송해주었다. 이 묘비 사진과 마티뇽 박사가 남긴 사진이 일치하므로 그 묘비가 원 묘비임이 확실해졌다. 무덤은 용산 성직자 묘지에, 원 묘비는 본래의 자리를 찾았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바르톨로메오 소(蘇) 주교의 선교 열정이 이러한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소 주교의 헌신과 노력으로 조선천주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원을 받는 조선대목구가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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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3-27 오전 9:52:12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