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삶에서 이제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접어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내용은 세 번째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활 중에 예루살렘에 세 번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예루살렘에 가실 때는 아무도 나와서 빨마 가지(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입성하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빨마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여기서 빨마 가지에 대해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빨마를 종려나무라 했습니다.(요한 12,13) 종려나무는 야자나무 과(科)에 속하는 나무인데, 쉽게 ‘야자나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팜 트리(palm tree)인데, 이때 팜(Palm)은 라틴어 빨마(Palma)에서 왔습니다.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우리는 성지를 빨마 가지라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에 흔했던 빨마(야자나무)는 대추야자 나무(date palm)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빨마가 귀하기에 측백나무 가지를 사용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빨마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임금이 올 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입성할 때입니다. 그만큼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혹은 장군처럼 위대한 인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첫 번째 두 번째 예루살렘에 오실 때는 그렇게 하지 않다가 왜 세 번째 방문 때는 빨마 가지를 흔들었을까요. 처음 두 번의 방문 때는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나병 환자를 일으키시는 등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를 기다려 왔습니다.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줄 해방자로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선조들은 400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고통받았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수모를 겪던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을 갈구하며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 염원을 예수님께서 이뤄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옛날 모세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능력을 예수님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큰 환대를 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나 같았으면 “내가 왔습니다!”하고 크게 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작은 나귀를 타고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환호에 응답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그런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의 억압으로부터 신음하는, 죽음의 종살이에 있는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환호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가야할 길을 가십니다. 이때 사람들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일주일 뒤, 법정으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시고 끌려가십니다. 그러자 군중은 돌변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대신 바라빠를 살리라고 외칩니다. 바라빠는 단순한 강도 혹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객입니다. 바라빠는 열혈당원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독립투사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 힘없어 보이는 예수님보다 차라리 바라빠를 살려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2000년 전 빨마 가지를 흔들던 군중 속에는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 그 은혜에 감격한 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 군중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왜 빨마 가지를 흔들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면 안되는 일도 술술 잘 풀린다더라.’ ‘예수님을 모시면 집안에 우환이 없어진다더라.’ ‘성당에 가면 인맥이 넓어져서 장사가 잘 된다더라.’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시나요?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은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예수님을 버립니다. 빨마 가지를 흔들던 그 사람들이 갑자기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것처럼 말이죠.
성지 주일에 사용했던 빨마 가지는 집에 가져가서 1년 동안 보관했다가 다음해 재의 수요일에 재로 사용됩니다. 이렇게 1년 동안 빨마 가지를 집에 보관하는 이유는 1년 동안 자신이 빨마 가지를 왜 흔들었는지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그 고통의 정중앙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그 참담한 심정의 예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향해 빨마 가지를 흔들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왜 흔들고 계시나요?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예수님을 맞이하고 계시나요?
글 _ 안성철 신부 (마조리노, 성 바오로 수도회)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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