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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음과 약함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 체험 2021-03-04
▲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 병자들과 나병 환자들, 구걸하는 사람들 가운데 살 때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림은 나환자를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성인.





연약함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관계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깊숙이 이 관계성 안에서 사랑의 흐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밥 스튜어트 형제의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영어에 ‘interface’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접점’이라는 말로 해석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본디 의미는 ‘얼굴을 서로 교환하는 것’, 혹은 ‘두 개체나 두 사람이 공통의 얼굴을 지니는 곳(혹은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이 삼위일체의 진정한 사랑의 힘이 나오는 곳이고,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 모든 피조물은 이러한 본질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삼위일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모두 이것을 살아내야 할 소명을 부여받고 창조된 것이다.

밥 스튜어트 형제가 필자에게 말했던 ‘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라고 했을 때, 그는 암 투병 중 겪은 연약함의 체험 안에서 은연중에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을 직감하고 그것을 필자에게 말해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말한 것이 바로 이 ‘interface’였고,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영원한 관계성의 춤에서 나오는 온전한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감히 짐작해 본다.

이런 ‘interface’를 프란치스코 역시도 나환우와의 만남 체험에서, 그리고 그 이후 다른 모든 사람, 특히 병자들과 약한 이들, 걸인들, 심지어는 모든 피조물과의 만남 체험에서 체험했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프란치스코가 다음과 말할 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삼위일체적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병자들과 나병 환자들, 그리고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해야 합니다.”(1221년 「수도 규칙」 9,2)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구걸하는 삶으로 초대할 때 그는 은연중에 형제들이 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은 억측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음’과 ‘약함’의 신비와 지혜는 프란치스코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서 체험한 것이고,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적 체험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신의 첫 번째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서두에서 이 인격적 만남에 대해 상당한 강조점을 두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3항)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은 프란치스코의 삶과 영성에 있어 그 근본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유언에서 단순히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樣式)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유언 14절)

여기서 ‘복음의 양식’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면 어떤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먼저 마르코 복음의 첫 문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그 첫 문장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동격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 ‘기쁜 소식’, 혹은 ‘기쁜 말씀’ 자체라는 말이다.

프란치스코가 ‘복음의 양식’이라고 말할 때, 의도했던 바는 어떤 규정이나 규칙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여기서 ‘양식(forma)’이 뜻하는 것은 규정이나 규칙이 아닌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이 유언 내용을 다른 말로 바꾸어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의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가톨릭평화신문 2021-03-04 오전 10:00:09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