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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7) 스테파노가 체포되다 (6,8-15) | 2019-05-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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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봉사자를 뽑는 이야기에 이어 사도행전 저자는 즉시 스테파노를 부각시킵니다. 스테파노의 체포(6,8-15)를 시작으로 설교(7,1-53)와 순교(7,54-60)로 이어지는 스테파노 이야기는 사도행전 첫 부분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또 다른 국면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이번 호에는 체포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지혜와 능력 충만한 스테파노 일곱 봉사자 선출과 관련한 앞 대목에서 스테파노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으로 묘사한 루카는 스테파노의 체포 이야기에서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6,8)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 두 절을 합쳐서 보면, 스테파노는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과 능력으로 충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6,8) 일으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적과 표징’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이해됩니다.(2,19.22 참조) 이적과 표징은 또한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기도 합니다.(2,22; 4,30)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많은 이적과 표징들을 일어나게 하십니다.(2,43; 5,12) 스테파노가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는 것은 단순히 식탁 봉사를 하는 차원을 넘어 이적과 표징들을 통해 사도들이 하는 일 곧 말씀 선포의 직무도 함께 행하고 있으며 적어도 행하는 일에서는 사도들과 같은 대열에 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백성 가운데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킨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유식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반박도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스테파노에게 벌어집니다. 몇몇 사람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들은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6,9)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을까요? 스테파노와 논쟁한 사람들 해방민들이란 전쟁 등으로 노예가 돼 끌려갔다가 자유인이 돼 풀려난 사람 또는 그 후손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로마 장수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많은 유다인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고 하지요. 키레네인들은 북아프리카, 지금의 리비아에 있는 도시 키레네에서 살았던 유다인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키레네에는 많은 유다인이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병사들이 키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했는데(마르 14,21), 같은 지역을 가리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는 큰 항구도시로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70인역’인 그리스어 구약성경이 편찬된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킬리키아는 오늘날 터키 남부 지역으로 그 지방의 수도는 바오로 사도의 출신지인 타르수스였습니다. 따라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이들은, 말하자면 대부분이 외지에서 들어온 유다인로서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을 위한 회당을 두고 있을 정도로 신심이 깊었고, 유다교의 가르침이나 율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루카는 기록합니다.(6,10)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난이 시작되어 증언할 기회가 올 때에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5)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스테파노에게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합니다.(6,11) 그뿐 아니라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까지 부추기고는 스테파노를 붙잡아 최고의회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말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6,12-14) 거짓 고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던 이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고발하게 하는 모습은 예수님의 재판 때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르 14,58; 마태 26,61) “그러자 최고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6,15) 유심히 바라본다는 것은 스테파노가 무슨 말을 할지 주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읽고 나서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한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루카 4,20) 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 얼굴처럼 보였다는 것은 그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타보르산에서 모습이 거룩하게 변하셨고(루카 9,29),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내려왔을 때 얼굴이 빛난 데서 알 수 있듯이(탈출 34,29), 스테파노의 얼굴이 변했다는 것은 이제 중대한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생각해봅시다 1.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나름대로 잘 났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논쟁을 벌였지만,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은 스테파노에게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테파노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 곧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우리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지요? 우리는 어떤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요? 2.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나름대로 확신에 차서 논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논쟁에서 당해내지 못하자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뿐 아니라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고발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논쟁을 벌일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선의에서 시작하지만, 논쟁이 격화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짓누르려고 하기 쉽습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큰 악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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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5-15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