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나는 이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역사 상 처음으로 충북을 방문한다. 교황이 청주교구 내 꽃동네를 방문하는 초점은 ‘장애인들과의 만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꽃동네 희망의 집을 찾아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데, 이때 교황에게 특별히 소개되는 이들이 있다. 오미현 리나, 차필립보, 김인자 세실리아, 이바오로, 홍도비아 등이 그들이다. 사랑은 사랑을 부른다!
1. 오미현 리나
식물인간으로 20년 병상생활… 환한 웃음의 꽃동네 ‘미소천사’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웃음… 봉사자들이 감동 배워
오 리나는 1994년 10월 3일 꽃동네에 들어 왔습니다. 버려진 상태로 말입니다. 그때 나이 세 살 정도로 추정되니, 지금 오 리나는 스물 세 살의 어엿한 아가씨입니다. 가족 사항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사지가 마비된 채 누워 간병인과 의료인의 간호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 왔습니다.
오 리나는 뇌성마비에 정신지체, 간질 등을 앓고 있습니다. 오 리나가 처음 입소했을 때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밥을 삼키기도 어려운 상태여서 죽을 먹여야 했고, 두 다리는 부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족이나 리나를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 학대를 해서 생긴 것으로 보였습니다. 설상가상 1998년부터는 간질증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패혈증 증세로 두 번 입원하면서 죽음의 문턱까지 넘나들었습니다. 2004년부터 오 리나는 반복되는 흡입성 폐렴으로 인해 기관절개술 수술을 받고 입으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그때부터 튜브를 통해서 영양을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도 생식기 질환과 척주기형으로 3~4 차례 수술을 더 받아야 했습니다. 오 리나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나마 현재 상태는 좋아진 편입니다. 비록 사지마비 상태로 항상 누워서 지내야 하고 기관를 절개한 곳으로 수시로 가래를 뽑아서 호흡을 유지시켜 주어야하고, 튜브 영양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녀가 견뎌온 시간에 비하면 많이 호전된 상태입니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자세를 변경하여 주면서 대소변 수발을 하고 목욕을 정기적으로 시켜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면서 꽃동네 가족들은 흐뭇한 미소를 짓곤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병고와 버림받음의 고통을 안고 20여년을 살아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은 항상 환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아름다운 미소를 짓습니다. 간병하는 봉사자들과 의료인들과 방문객들은 그녀의 환한 그 미소를 보며 기쁨을 얻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녀는 식물인간 가까운 삶을 살면서도 사랑의 돌봄과 간호를 통해 이웃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셈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항상 예쁜 미소를 지어 삶에 지친 이들에게 그녀는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는 사랑의 전도사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 리나를 ‘미소 천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 차 필립보
아나운서가 꿈인 당찬 꼬마… 교황님께 꽃다발 증정 예정 사지 마비에도 늘 ‘홀로서기’… 미사 땐 성가대 활동도
차 필립보 어린이는 2005년 4월 18일 출생입니다.
미혼모의 아이인 필립보는, 엄마가 병원을 찾아 임신사실을 안 후 아이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낙태를 하려 했지만, 겁이 나서 그냥 출산 했다고 합니다. 필립보를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고 입양을 시키려했으나, 입양기관에서는 장애아라는 이유로 입소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립보는 서울 의료원 사회복지사에 의해 꽃동네로 입소하게 됐습니다. 차 필립보가 앓고 있는 병명은 근무력증으로 인한 사지 운동장애입니다.
현재 필립보는 꽃동네학교 3학년 재학 중입니다.
사지의 근무력증이 심해 식사를 홀로하는 것도 어려운 상태인데도 의지가 강하여 일상생활에서도 도움을 받기보다는 혼자 하려는 의지가 아주 뛰어납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을 말로 잘 표현하고 컴퓨터도 즐기며 노래도 잘하여 미사 때 성가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평소 생활할 때에는 남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끝까지 하려고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줍니다. 참 대견한 모습입니다.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 할 때 보조기구를 사용하기보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도구를 사용해 학습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매우 뛰어난 아이입니다. 차 필립보의 꿈은 눈이 보이지 않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아나운서가 되는 것입니다. 교황님을 만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이 기쁘고 꿈만 같다는 필립보는 교황님 오실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부푼 마음에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3. 김인자 세실리아
손과 같은 그녀의 발… 발은 세상을 소통하는 통로 발가락 이용해 모든 일 척척… 장애우 가족 돌봄까지
김 세실리아는 1940년 12월 15일 인천시 내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올해로 만 74세가 됩니다. 뇌성마비(상지 마비)에 경추 디스크가 그녀의 병명입니다.
상체를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세실리아는 독학으로 배운 한글로 독서량이 매우 풍부합니다.
인천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나 생활하다 보살펴 주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스스로 꽃동네에 가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1985년 음성 꽃동네에 입소하여 꽃동네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두 발로 모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발로 식사를 하고, 세수도 발로 합니다. 일상생활과 취미 생활도 모두 발로 합니다. 발가락으로 종이학을 접고 자수를 놓으며, 또한 전신 장애인들을 도와주며 봉사활동에도 앞장섭니다. 그래서 발은 그녀에게 손과 같습니다. 손이 하는 것처럼 발로 전신 장애인들을 능숙하게 수발드는 모습을 보면 마치 묘기를 보는 듯합니다. 풍부한 독서량과 절망을 이겨낸 그녀의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을 보면서 우리들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녀는 꽃동네를 찾는 봉사자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깨달은 것들을 전하며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 가고 있습니다. 발가락을 모아 써내려 가는 붓글씨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오밀조밀 종이학을 접는 발가락을 보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실의에 빠져 극단적인 생각을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그녀가 접은 종이학은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오밀조밀한 발가락 놀림이 자살을 막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녀의 재능이 완성된 것은 스스로 끝없는 노력을 통해 갈고 닦은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그 재능을 통해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그녀는 교황님을 기다리며 접어놓은 종이학과 거북이를 교황님께 선물할 생각으로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그녀는 또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사후에 안구와 장기, 사체까지 모두 기증하였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열심히 살았기에 떠날 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고 떠나겠다는 분입니다. 장애와 노환으로 인해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와 침대에 의존하여 살아 가고 있지만 늘 이웃을 생각하고 여유 있는 미소와 농담을 잃지 않으시는 인자하신 할머니, 김 세실리아입니다.
4. 이 바오로 두개골 함몰로 흉한 모습이지만 마음만은 아름다운 아저씨
이 바오로를 처음 본 사람들은 아저씨의 흉한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두개골 함몰로 보통사람들의 얼굴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보지 못했던 안면 기형, 그런데 두 번, 세 번 그를 보게 되면 거리를 두었던 그 마음이 어느샌가 다 녹아버리고, 푸근하고 구수한 말소리에 정겨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바오로가 꽃동네에 들어 온 것은 2008년 12월 18일, 올해로 6년이 되어 갑니다. 그날 꽃동네에 버려진 그를 꽃동네가 받아들인 것인데, 아마도 이씨를 버린 가족이나 친구들은 더 이상 그를 가족이나 친구로 여기고 싶지 않아서, 혹은 큰 장애를 가지고 있는 가족을 돌보며 세상 현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그랬던 것이리라 짐작됩니다.
이 바오로는 기억 장애가 있습니다. 해서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흐린 가을에도 언뜻언뜻 구름사이로 쪽빛 하늘이 맑게 보이듯, 그의 흐린 기억 속에서도 언뜻언뜻 명징한 과거가 되살아나는 듯해 보입니다. 바오로가 안면 기형을 갖게 된 것은 군대를 갓 제대한 무렵이라고 합니다. 제대 후 한 달 만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두개골이 함몰되는 큰 사고였습니다. 사고 후유증으로 바오로는 기억 장애와 보행 장애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세상살이에 이씨는 ‘걸림돌’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로부터 버려져 꽃동네에 오게 된 바오로에게는 자녀가 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기억만 있을 뿐, 그 이후의 기억은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억 장애와 신체 장애가 겹쳐져 자립해 살아 가기는 불가능합니다. 또 안면 장애가 심해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가까이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으로 늘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구수한 목소리로 기분좋게 전해져 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어느 결에 그에 대한 경계심을 풀곤 합니다. 앉은 채로 엉덩이를 밀고 다니며 바오로는 손바닥을 쓸며 희망의집 복도를 청소합니다. 자원봉사자나 근무자들이 “그런 건 우리가 한다”고 해도 그는 눈웃음 한 번 씨익 보내곤 말없이 청소를 합니다. 겉 모습을 보고 꺼려했던 사람들은 바오로의 속 모습을 보고 어느새 친근해져 있습니다.
5. 홍 도비아
“세상 빛 몰라도 행복의 빛깔은 알아요” 15년 동냥해 모은 100만원 기탁… 꽃동네 알코올요양원 종자돈으로
홍 도비아는 1938년 충북 중원군(충주시) 노은면 죽고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홍 도비아는 세 살 되던 해 ‘삼눈’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부친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삼눈과 백태 낀 데는 회충을 빻아 그 가루를 바르는 게 최고라는 민간요법을 듣고 아이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아이는 데굴데굴 구르며 통증을 못참아 울부짖었고, 그 이후로 홍 도비아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홍도비아는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바라보았던 기억도 없습니다.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에게 세상은 그냥 암흑일 뿐입니다.
열여섯 살 때 충주 맹인학교에 들어가 3년간 있다 집으로 돌아 왔지만, 그를 반겨 주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에게 짐스런 존재였습니다. 손님이라도 오면 가족은 그를 골방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홍씨는 가족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날부터 홍 도비아는 전국을 떠돌며 걸인 생활을 했습니다. 동가식서가숙하던 홍씨는 1969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무극은 금광으로 번 돈으로 술과 여자를 찾으며 흥청망청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최귀동 할아버지를 만나게 됐습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남의 집 남는 밥을 얻어서 동냥조차 나가지 못하는 걸인들을 먹여 살리고, 세상을 떠나는 거지들은 지게에 지고 용담산에 장례를 지내주는, 참 마음 고운 걸인이었습니다. 홍 도비아는 그 마음을 닮으려 했습니다. ‘큰 뜻’을 품고 동냥하는 돈을 한푼 두푼 모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1976년 7월 무극성당에 오웅진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했습니다. 어느날 홍 도비아가 걸인에게 폭행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오 신부는 사제관으로 그를 데려와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홍씨가 마음에 두고 있는 장애여인과 혼인성사도 올려 주었습니다. 남매를 낳고 알콩달콩 살아가던 그의 꿈 중에 하나는 100만원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15년 동안 모은 돈은 그에게 따로 써야만 할 일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오 신부에게 건넸습니다.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는 것이었지요.
오 신부는 한사코 거절하다 그의 돈을 알코올중독자 요양원을 세우는데 종잣돈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건강하게 자라 결혼하고 자녀까지 두었고, 금왕에서 부모님 모시기에 소홀함이 없다고 합니다. 홍 도비아는 그동안 그의 선행이 인정되어 2013년 최귀동 봉사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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