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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_0810] 로마에서 서울까지, 세 번의 시복식 | 2014-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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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서울까지, 세 번의 시복식 1925년 79위, 1968년 24위는 로마에서... 2014년 서울에서 124위 시복
* 본 자료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월간지 <빛> 2014년 8월호 기고문 “로마의 시복식과 서울의 시복식”(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을 간추린 글입니다.
오는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릴 124위 순교자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 시복식이다. 첫 시복식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79위), 두 번째 시복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에(24위), 두 번 다 로마에서 열렸다. 두 번에 걸쳐 복자품에 오른 103위 순교자들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103위 순교 성인의 선조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이었던 124위 순교자 시복을 준비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를 발견한다.
1925년에 시복된 79위 순교자들의 복자화. 현재 서울 명동성당 대성전의 왼쪽 앞 벽에 걸려있다.
개념도 생소한 ‘순교자 표창식’, 로마 가는 길만 3개월 한국인 대표는 신부 1명, 유학생 2명뿐
1983년, 서울대교구 장익 신부(후에 주교로 서임되어 춘천교구장을 지냈다)는 삼촌 장발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장 신부가 보내준 사진에 감사하며 그 내용을 설명하는 편지였다.
“시복식 1925년 7월 5일 오전에는 시복, 치명자(=순교자) 선언식. 오후에는 강복, 복자 유해 친구(親口: 경의를 표하는 입맞춤)가 있었다. 7월 5일 아침 기상 시복식 참여 준비를 차렸으나 형님은 심한 두통과 몸이 불편(아마 연일 과로로 인함이었을 것)하시어 유감스럽게도 못 가시고 나 혼자 식에 참여하였는데 우리에게 복자 친족에게 주는 특별석 초대장을 가졌으므로 특별석에 갔으나 그곳에서 동경 상지대학에서 함께 있던 시부따니(澁谷 sibutani) 성경연구 신학생, 만주에서 온 신학생 유핀(于斌)을 만났다. (후일 시부따니 신부는 성서연구로 유명하게 되고 유핀은 [南京] 대주교가 되었음.) 사진에 있는 것과 같이 성전 내는 휘황 전광 밑에 베르니니(Bernini) 작 엑스 가떼드라(Ex Cathedra) 제대 위에 평상시 성신상이 있는 비둘기창(Dove Window)에는 우리 치명자들의 모습이 걸려있었고 중앙 교황제대 돔(Dome) 양측 지주 양측 벽상에는 김(효임) 골롬바와 순교자, 다른 편에 유(대철) 베드로의 순교장면이 걸리었고 성전 외부 교황 강복 내리시는 곳에는 (사진 소형 치명상)이 장식되었으며 각국대사 귀빈 성직자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 복자들의 성명 직업을 밝히 낭독하였고 복자가 됨을 선명하였다, 나는 식이 끝난 후 한 신부와 함께 우리 복자들의 그림을 일일이 보고 감격에 벅찬 중에 있었으나 어떤 여교우는 한 신부의 수단(성직자 평상복) 옷자락을 끌어 친구하는 이도 있었다.”
1925년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식이 로마에서 열렸다. 이때 미국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장면(장익 주교의 아버지), 장발 형제가 시복식에 친인척은 아니지만 친인척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사진은 시복식 다음날 교황 비오 11세가 시복식 관계자를 미사에 초청하여 알현한 뒤에 함께 찍은 사진이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 교회는 시복식이 대략 6월에 있을 거라 예측하고, 시복식이 열리는 로마가 너무 멀기 때문에 미리 대표단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70세를 넘긴 서울교구 뮈텔 주교와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 두 분이 대표가 되어 3월 17일 수행원도 없이 출발하였다. 둘은 여객선을 타고 부산을 출발하여 고베, 상해, 홍콩, 싱가포르, 사이공, 스웨즈 등을 경유하여 프랑스 마르세유를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을 떠났다. 이들은 3개월의 긴 여정 끝에 6월 17일 로마에 도착했다. 79위의 시복식이 7월 5일에 열린다는 것도 5월초에야 알게 되었다. 시복이라는 용어도 없던 터라 당시 신문은 ‘순교자 표창식’(동아일보 1925,3,19)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당시 로마까지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가난한 신자들은 안타까움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경향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가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해서 5월 11일 로마를 향해 떠났다. 또한 7월 1일에 장면, 장발 형제가 로마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편지에는 당시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한 신부는 시복식 풍경을 <경향잡지>에 ‘로마여행일기’로 연재하여 소개하였다. “이와 같이 좌정한 후 고등성직자 일위가 제대 좌편에 예비한 높은 제상에 올라서서 금상 폐하의 칙령을 낭독하니 이는 금상 폐하께서 조선 치명자 79인을 복자로 반포하시는 칙령이어라. 치명자들의 큰 상본(초상화)을 그려서 오처(다섯 군데)에 매달았으니 1은 대제대 뒤 벽상에, 2,3은 대제대에서 한참 나와서 양편 기둥에, 4는 성전 정문 위에, 5는 성전문 뒤 강복대(교황이 보세만민에게 강복하시는 높은 제상)에 매달았더라.(경향잡지 1925년 9월호)”. 시복식은 일반인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두 번째: 1968년 24위 시복식 한국 순례단 136명 전세기 타고 참석... 파독 간호사도 동참 아리랑 부르며 교황께 감사 인사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이 시복식에는 한국에서 전세기로 도착한 순례단 136명이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밖에도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 65명과 유럽에 유학 온 천주교 신자 등도 함께 있었다. 시복될 남종삼의 후손 7명도 함께 했다.
미사 주례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1969년 추기경에 서임)가 교황을 대리해서 맡았다. 그 역시 할아버지 김보현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의 후손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 칙서’ 낭독에 이어 김 대주교의 선창으로 <떼 데움>(Te Deum, 사은 찬미가)이 시작되고, 성당 전면에 걸려 있는 복자들의 초상화를 가린 막이 걷혔다. 미사의 여러 부분에 한국어가 사용되었으며 시복식과 교황 바오로 6세의 특별 연설은 5개 국어로 중계되었다. 미사 마지막에 교황청 합창대가 <복자찬가>를 부르자 한국인 참가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강론에서 24위의 한국 순교자들을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앙의 귀감’이라고 말하였다. 한국이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했다. 24위 복자가 로마에서 시복될 때 한강변 새남터순교성지와 양화진 복자기념 성당에서도 미사가 거행되었다. 다음 날 한국 신자들은 김수환, 노기남, 장병화 주교를 모시고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교황은 거듭 한국 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하였고, 1시간 20분이나 걸린 알현은 아리랑을 부르며 마무리되었다.
1925년 첫 시복식에는 한국인이 단 3명 참여했지만, 1968년 시복식에는 전세기로 참여할 정도로 많은 신자가 참석했다. 두 번에 걸쳐 복자가 된 이들은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이 땅에서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세 번째 : 2014년 124위 시복식 순교 현장 바라보며 교황이 시복 미사 주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 미사를 주례한다. 고작 3명의 한국인만이 참석하고 나머지는 마음으로만 함께해야 했던 1925년 시복식, 전세기를 타고 참여한 두 번째 시복식을 거쳐, 신자 20만이 참여하는 세 번째 시복식이다. 로마가 아닌 한국의 중심 서울 광화문 앞에서 영광스런 순교자들의 이름이 불릴 것이다. 윤지충 바오로, 강완숙 골룸바,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이성례 마리아...
한국 천주교회는 스스로 신앙은 받아들인 유일한 교회다. 극심한 박해를 이겨내고 지금의 복음화를 이뤄냈다. 시복은 교황의 대리자가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땅에서 직접 시복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고 영광스런 일이다. 더욱이 서울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 · 포도청 · 서소문 형장 등 한국의 제1세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성 테르툴리아노)이며 믿음의 씨앗(성 예로니모)이다. 탄생 230년을 맞은 한국 천주교회의 나아갈 길이 어디이며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가. 피로써 씨앗을 뿌린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들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